이미지 크게보기 원대연 전 한국패션협회장이 지난 1일 제주 서귀포시 블랙스톤 제주 골프클럽에서의 라운드에 앞서 연습그린에서 퍼팅을 성공시키고 있다.

■ 원대연 전 한국패션협회 회장

2001년 JP·박세리와 프로암
JP 79타·朴 72타 단체 우승
기분 좋았는지 JP가 저녁 사

삼성 근무 시절 박세리 발탁
주택제공·전담팀에 레슨까지
5년 150억원 전례 없는 지원
‘세리의 성공 신화’ 숨은 주역

원대연(74) 전 한국패션협회장은 ‘골프 여왕’ 박세리의 성공 신화에 밑그림을 그린 인물이다.

삼성은 1990년대 말 안양골프장에서 30명의 골프 꿈나무를 키웠다. 하지만 선수 간 반목하는 사건이 자주 발생해 잡음이 일었다. 이에 당시 삼성물산 패션 부문을 총괄하던 원 전 회장이 특출난 선수 발굴 프로젝트가 필요하다며 박세리를 발탁해 그룹 고위층에 보고했다.

1997년, 삼성과 박세리의 계약은 파격이었다. 삼성은 당시 박세리에게 5년 동안 연 30억 원씩을 지급했다. 우승하면 보너스도 별도였으며, 5년 연장 옵션도 넣었다. 박세리는 과장 대우, 부친은 부장 대우를 받았다. 박세리를 위한 ‘세리 전담지원팀’도 설치됐으며, 삼성은 경기 성남시 분당에 50평대 아파트까지 사줬다. 박세리는 삼성의 도움으로 남자 선수만 가르치던 데이비드 레드베터에게 1년 교습도 받았다.

박세리는 이런 지원 덕에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성공신화’를 썼다. 1998년 LPGA투어 진출 첫해 메이저대회였던 맥도날드 LPGA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박세리는 몇 달 뒤 US여자오픈에서 ‘맨발 샷’ 투혼을 발휘하며 ‘국민 영웅’으로 등극했다.

지난 1일 제주 서귀포시 블랙스톤 제주 골프클럽에서 만난 원 전 회장은 “당시 외환위기로 회사는 어려웠지만, 그룹 차원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박세리는 1998년 한 해에만 4승을 따냈다. 삼성은 1998년 박세리에게 보너스와 광고비 등으로 500억 원 규모의 지원에 나섰고, 이는 한국 여자 골프의 세계화를 알리는 시발점이 됐다.

원 전 회장은 신문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69년 중앙일보 공채 6기로 입사한 원 전 회장은 유신체제 후 기자생활에 회의를 느끼며 진로를 고민하던 중 삼성그룹 임원 추천으로 기자직을 던졌다. 원 전 회장은 이후 삼성물산 사업본부장을 지낸 뒤 1998년부터 2004년까지 제일모직 대표를 지냈다.

원 전 회장은 ‘독일 병정’으로 불릴 만큼 골치 아프고 힘든 일을 척척 해결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또 1993년 삼성이 대대적인 개혁을 이루던 시기에 의류 명품을 만들기 위해 뉴욕의 파슨스 패션스쿨과 제휴해 국내에 패션학교를 설립, 7년 동안 학장을 겸직했다. 원 전 회장은 삼성에서 퇴직 후 2018년 2월까지 한국패션협회(현 한국패션산업협회) 회장을 14년 동안 지냈다.

원 전 회장은 198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삼성물산 지사장 시절 골프를 배웠다. 해외지사장은 대개가 1∼2년 쉬었다가 가는 자리. 그런데 4년이나 한 곳에서 지사장을 지낸 것은 삼성에서 원 전 회장이 처음이었다. 원 전 회장은 교민이나 현지인과 교유가 많다 보니 지사장을 맡은 지 3년이 지나서야 골프연습장엘 처음 갔다. 현지 프로에게서 하루에 1시간씩 10여 차례 1 대 1 개인지도를 충실히 받았다. 이때 배웠던 골프가 그의 골프인생에서 든든한 밑천이 됐다. 원 전 회장은 1년 후 서울 본사로 발령 났지만 일이 바빠 제대로 골프채를 잡지 못하다가 1985년 이사, 1987년 본부장이 되면서 골프를 칠 수 있었다.

원 전 회장의 베스트 스코어는 74타. 2001년 경기 용인 레이크사이드CC 서코스에서 열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아스트라챔피언십 프로암에서다. 이날 동반자는 박세리, 김종필(JP) 자민련 총재, 윤세영 SBS 회장이었다. 원 전 회장은 보기가 여럿 나왔지만, 퍼팅이 신들린 듯 홀로 쏙쏙 들어가면서 후반 16, 17, 18번 3개 홀 연속 버디를 포함해 버디 5개를 뽑아냈던 것. 이날 박세리가 72타를, JP가 79타를 치며 프로암 전체 단체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JP가 기분이 좋았던지 동반자들을 주말에 신라호텔로 초대해 저녁을 샀다. 원 전 회장은 지인들과 라운드를 한 2009년 11월 강원 춘천의 라데나 골프장 네이처코스 3번 홀(파3·130m)에서 홀인원을 딱 한 번 작성했다.

원 전 회장은 “그동안 골프에 투자한 것을 공부로 치면 박사학위 몇 개는 받았을 터인데… ‘옛날 생각’만 하다 보니 스스로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240야드 비거리로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던 그였지만 200야드만 보내도 감사할 따름. 이젠 또래 친구보단 주로 40∼60대 후배들과 골프를 자주 친다는 그는 “아직 ‘화이트 티’에서는 버틸 만하다”고 전했다.

아내와 함께 제주도에 휴가차 내려왔다는 원 전 회장은 지인 부부와 이곳에서 사흘 연속 골프를 쳤다고 했다. 원 전 회장은 “젊은 시절 함께 하지 못한 미안한 마음에서 요즘 라운드 절반은 아내와 함께 치고 있다”고 귀띔했다. 원 전 회장은 제주에서 첫날과 둘째 날은 84타와 86타를 쳤지만, 사흘째엔 90타를 넘겼다고 전했다.

원 전 회장은 걷는 게 산삼을 먹는 거보다 낫다는 생각에 지금도 골프장에서는 카트를 타지 않고 걷는다. 이는 40대 때부터 익혀온 습관이다. 원 전 회장은 제일모직 대표 시절 삼성본관 21층 집무실까지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으로 걸어 올라다닌 적도 많았다. 체력부담 탓에 지금도 19층인 사무실을 갈 때는 11층에서 일부러 내려 나머지 층을 걸어 다닌다. 집에서도 스트레칭을 매일 빠지지 않고, 헬스장에 가서도 2시간씩 시간을 보내며 몸 관리를 해오고 있다. 원 전 회장은 “골프장에서는 카트를 타지 않고 늘 걷다 보니 막판에 체력이 부담되지만 여전히 두 발로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했다.

원 전 회장은 40년 가까이 골프를 즐길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동반자와 자연에서 편안하게 희희낙락하는 스포츠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안 가본 전국 골프장을 두루 돌아보고 싶다”고 전했다.

제주=글·사진 최명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