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박원순 전 서울시장에 대한 성추행 고소를 계기로 집권세력의 도덕적 해이를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지난 16일 서울대 중앙도서관 게시판에 성추행 피해자를 응원하는 메모들이 붙어 있다. 연합뉴스

■ 박원순 죽음이 말하는 것

여성평등 외친 진보세력, 되레 피해자 2차가해… 좌파 집권세력의 성인지감수성 ‘바닥’ 드러내
‘촛불혁명’ 무오류 환상 빠져 성범죄 눈감으며 ‘면죄부’… 재발 방지 위한 엄격한 입법 이뤄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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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진보’ 세력들은 여성이 차별받지 않는 세상, 모든 여성이 인격체로 존중받고 자기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세상을 그들이 건설하려는 세상의 청사진으로 제시함으로써 여성을 ‘우군’으로 확보했다. 여성의 지원이 없었다면 그들의 집권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잇단 여권 인사의 성폭행 사건에 이어 박원순 전 서울시장에 대한 성추행 고소를 접하면서 좌파 중에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하는 자가 없는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좌파 ‘무오류성’ 착각이 빚은 약탈

지도층에서 일어난 지난 몇 년간의 성추행·성폭행 사건들은 거의 대부분 좌파 인사들에 의한 것이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오거돈 전 부산시장 사례 말고도 이 정권 들어서 여권과 그 주변 인사들의 성인지 감수성이 얼마나 바닥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는 허다했다. 청와대 선임행정관 임명 때부터 여성 비하 논란이 있었던 탁현민이나 팟캐스트 방송에 출연해 성적 비하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은 김남국 등이 ‘잘나가는’ 것을 봐도 이 정부는 여성의 존엄성에 대한 개념이 희박한 게 분명하다. ‘촛불 혁명전사의 무오류성’이라는 환상에 빠져서 남(우파)이 하면 범죄인 것도 자기네(좌파)가 하면 정의고 개혁이라는 신념에 절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성희롱 정도는 혁명영웅의 월계관으로 간주하는 것인가.

박 전 시장을 변호하고 동정하는 모든 여성에게 묻는다. 그의 ‘절절한’ 텔레그램 메시지나 피해자 무릎의 멍에 대한 ‘연민’이 그 여성을 애절하게 연모하고 아끼는 마음에서 나왔을까. 박 전 시장이 피해자를 느긋하게 놀리며 그녀의 불안과 공포를 즐기는 동안 그 여성은 발 없는 새처럼 내려앉을 곳이 없어 계속 날개를 파닥였을 것이다. 현 집권세력의 모든 비리와 도덕적 해이를 예견한 듯한 ‘잠언’을 준비한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일찌감치 설파했듯이, ‘성추행은 연애가 아니’다. 성추행·성폭행의 동기는 사랑이 아니고 약탈본능의 충족이다.

◇현대판 ‘貞操 사냥’과 주홍글씨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에서 사유재산이 생기면서 재산을 이루고 소유한 남성이 재산을 확실히 자기 혈육에게 상속하고 싶어 여성에게 정조(貞操)의 의무를 지웠다고 주장했다. 핵가족이 자본주의와 함께 탄생했다는 글의 논지엔 반론이 많지만, 유럽의 경우 상류층(귀족·신사계급)의 형성과 함께 여성들이 ‘숙녀’로 격상되면서 동시에 ‘정조 이데올로기’의 엄격한 사슬에 매이게 된다. 여성의 정조는 여성의 가치·존엄성 그 자체가 돼 여하한 경위로라도 정조를 상실한 여성은 태양 아래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이렇게 정조가 여성에게 사활적 사안이 되니 약탈자들의 ‘정조 사냥’이 시작됐다. 사냥꾼들은 감언이설과 거짓 맹세로 여성을 유혹해 ‘정복’했고 자칭 ‘멋쟁이’에겐 농락한 여성의 수효가 그들 자존심의 크기가 됐다. 모든 권력이 재산 많은 남성에게 집중됐던 귀족·신사 사회에서 피해 여성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거나 거리의 여인으로 전락한 반면, 가해 남성은 한차례 비난의 물결이 지나간 후에는 부와 권세가 있는 집안의 규수와의 결혼을 협상할 수 있었다.

유교 국가 조선에서는 엄격한 내외법 때문에 양반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성범죄는 드물었지만 ‘환향녀’들이 어떤 운명에 처했는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처지가 어떠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오늘날에도 그 주홍글씨의 함정은 메워지지 않았다.

◇성폭력은 여성 지배욕 충족행위

남성들은 (놀랍게 일부 여성도) 남성들이 이렇게 약탈자가 되는 것이 그들이 제어할 수 없는 열정·성욕 때문이라고 변호한다. 모든 인간은 사회질서에 위해가 되지 않도록 자신을 다스리면서 살 의무가 있는데, 자기 충동을 조절하지 않고 죄 없는 여성을 괴롭히면서 태연히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을 인격체로 인정할 수 있는가. 이는 권력형 횡포라는 점에서 남성 부하에 대한 ‘갑질’과 같은 범주지만, 여성이 느끼는 고통과 후유증은 남성이 받는 그것과는 비할 수 없이 심각하다.

그동안 여성들의 자각으로, 그리고 일부 사려 깊은 남성의 조력으로 여성의 지위가 크게 향상돼 이제 여성이 그토록 절망적인 피해자가 되는 일은 없을 듯하지만, 이번 사건이 웅변으로 보여주듯이 여성은 아직도 절대 약자다. 이 사회 권력의 80% 이상이 남성에게 집중돼 있고 너무나 많은 남성이 그들의 권력을 여성과 공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성을 짓밟고 농락하기 위해 사용한다. 수전 브라운밀러는 성폭력의 심리와 역학을 분석한 저서 ‘ Against Our Will ’에서 여러 사례를 들어 남성의 성폭력은 제어할 수 없는 욕정의 발현이 아니라 권력과 지배욕, 상대를 비하하고 싶은 욕망을 충족하는 행위임을 논증하고 있다.

고대에는 남성의 성적 가해 행위가 여성에 대한 범죄로 처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결혼시장에서 피해 여성의 교환가치를 훼손해 여성의 아버지에게 손해를 입힌 데 대해 처벌을 받거나 보상을 해야 했다. 여러 고대사회에서는 결혼한 여성이 성폭행을 당하면 명백한 피해자라도 간음녀로 군중에게 내맡겨져 투석형을 당했고 중동에서는 최근까지도 그러했다. 전쟁 시에 여성의 성적 수난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그 참혹함을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인권변호사의 면죄부 의식

박 전 시장의 경우에는 여성인권변호사 경력이 자신의 변태적 성적 유희에 면죄부를 준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성범죄에는 어느 누구의 비행이라도 면죄부가 있을 수 없다. 더구나 만약 피해자에게 고발당하지 않으려고 피해자를 부하직원에게 ‘넘기려’ 했다면 이는 천인공노할 소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최근에 서울시청 비서실에서 일어난 성폭행 사건이 매우 불길한 느낌을 준다. 이 대목에서 19세기 영국의 문호 찰스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라는 장편이 상기된다. 소설 속 탕자 스티어포스는 시골소녀 에밀리를 유혹해 농락한다. 그러고는 자기의 시종에게 그녀를 ‘양도’하려 한다. 예전의 방탕한 귀족들은 시종에게 약점을 많이 잡혔기 때문에 가끔 자기가 농락한 여인을 ‘하사’했는데 이는 시종에게 주는 일종의 뇌물이면서 동시에 피해 여성으로 하여금 자기에게 더 이상 권리를 주장할 수 없게 입을 막는 방책이었다.

◇박원순 사건이 남긴 과제

우리 사회가 박 전 시장의 죽음 이후 피할 수 없게 된 문제는 첫째, 이토록 취약한 사회구조에서 여성들이 성추행의 표적이 되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느냐, 그리고 둘째, 성적 자제심이 없고 자제심을 기를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 무수한 남성으로 하여금 어떻게 인간의 기본 도덕과 예의를 지키도록 회유·설득하느냐이다.

이 정부에는 기대할 수 있는 바가 없어 보인다. 미국의 CNN 방송조차 지난 주말 “문재인 대통령은 아직 (박원순 전 시장 성추행 고소 사건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의한 적이 없다”고 ‘대통령의 침묵’을 비판했다. 그래도 국민의 여론으로 더욱 엄격한 입법을 요구해야 한다. 지금은 모든 국민이 허탈하고 비참하지만, 딸을 가진 그리고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모든 남성과 인격의 존엄성을 지키고 싶은 모든 여성이 함께 전열을 가다듬어야겠다.

고려대 명예교수


■ 세줄 요약

바닥 수준의 좌파 性인식 : 최근 여권 인사들이 벌인 성추행 사건은 집권세력의 성인지 감수성이 바닥 수준에 있다는 것을 드러냄. ‘촛불 혁명전사의 무오류성’이라는 환상에 빠져 ‘내로남불’식 신념에 절어 있는 것. 성추행 동기는 사랑이 아니고 약탈본능의 충족임.

성폭력은 권력자의 지배욕 : 근대 들어 ‘정조(貞操)’가 여성에게 사활적 사안이 된 이후 약탈자들의 ‘정조 사냥’이 시작됐으며, 오늘날도 이런 행태가 이어짐. 수전 브라운밀러는 남성의 성폭력은 여성에 대한 지배욕과 비하 욕망을 충족하는 행위라고 밝힘.

박원순 사건의 충격성과 과제 : 박 전 시장은 여성인권변호사 경력이 자신의 성적 유희에 면죄부를 준다고 생각했을 수 있음. 서울시가 피해 여성을 입막음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대응했다는 분석이 나오는데 사실이라면 충격적. 재발 방지를 위한 엄격한 입법 요구됨.

■ 용어 설명

‘Against Our Will’은 미국의 작가 수전 브라운밀러가 쓴 책. 성폭행을 자기방어 수단을 갖지 않은 여성을 목표로 삼아 저지르는 ‘권력 범죄’라고 밝히고 있음.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라는 번역서로 나와 있음.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은 엥겔스가 마르크스 저술 메모를 기반으로 1884년 출판한 논문. 인류학적 저술이자 가족·여성·국가 경제에 대한 최초의 저술인데, 현대 여성학에서도 중요한 고전적 문헌으로 손꼽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