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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여자들 │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지음│ 황가한 옮김│웅진지식하우스

고대 그리스부터 현재로 이어진
여성에 대한 ‘기록의 부재’ 폭로

남성의 평균 손크기 기준 설정
5.5인치 스마트폰 女엔 안맞아

안전벨트도 여성들에겐 헐거워
사고시 ‘중상’ 확률 47% 높아

악의·고의적이지 않아 더 문제
모든곳의 여성 무시·배제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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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질긴 여자들에게, 앞으로도 계속 더럽게 까탈스러운 사람으로 남아주길.”

영국 지폐에 여왕이 아닌 여성 인물을 싣는 일에 앞장서는 등 여성 인권운동을 이끌어 온 저자는 책의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했다. 첫 장을 넘기자마자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던 카를 마르크스의 외침을 닮은 호소를 마주하자, 이 책이 ‘전투적 페미니스트의 혁명 선언’일 것이란 선입견을 갖게 됐다. 여성 인권 수호자로 평가받던 서울시장이 하루아침에 성폭력 가해자라는 의혹 속에 유명을 달리하고, 제자의 모습을 훔쳐보려 학교에 CCTV를 설치한 교사들이 줄줄이 검거되는 허탈한 시대에 이런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면서 선입견은 여지없이 깨졌다. “‘보이지 않는 여자들’은 우리가 인류의 반에 대해 기록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관한 이야기”라는 저자의 설명처럼, 이 책은 남성에 의해, 남성을 위해 만들어진 이 세계가 어떻게 인류의 절반인 여성을 배제했는지, 또 이로 인해 여성들이 어떤 고통을 겪어 왔고 겪고 있는지에 대한 적나라하지만 냉철한 폭로다. 저자는 여러 국제기구와 비영리단체(NGO), 정부 등의 공식 자료와 주요 매체의 기사, 연구 논문 등 1330여 건에 이르는 방대한 참고자료를 동원해 ‘팩트 체크’를 감행한다. 단지 분노한 여성의 외침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듯하다. 실제로 이 모든 자료와 증거는 하나의 결론으로 향한다. 고대 그리스로부터 남성을 인류의 ‘디폴트(기본값)’로 간주하는 역사가 이어진 결과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여성의 부재(不在)가 남긴 흔적, 다시 말해 ‘젠더 데이터 공백’으로 훼손됐다는 것이다.

별도 지표가 없는 이상 남성으로 간주하는 사고방식이 인류 역사를 지배한 결과인 ‘젠더 데이터 공백’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방면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여성을 옥죄고 위험에 빠트려 왔다. 피해는 작은 불편에서부터 생명의 위협에까지 이른다. 가령 스마트폰 액정의 평균 크기는 5.5인치(13.97㎝)다. 한 뼘의 평균 길이가 18㎝인 여성들은 스마트폰을 떨구는 게 다반사다. 설계에서부터 남성의 신체를 기준으로 한 결과다. 표준 사무실 온도도 몸무게 70㎏, 40세 남성의 기초대사량을 기준으로 설정됐다. 그 결과 여성들은 한여름에도 감기를 달고 산다.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여성이 중상을 입을 확률이 남성보다 47% 높다. 자동차 충돌시험에 신장 177㎝, 몸무게 76㎏의 남성 인형을 사용하는 바람에 안전벨트와 같은 개인 보호 장비가 여성에겐 헐겁다. 또 여성의 심장마비 증상이 오진 받을 가능성은 남성보다 50% 높다. 심장마비의 대표적인 전조증상으로 여겨져 온 가슴통증은 남성에겐 전형적이지만, 여성에겐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2014년 미국식품의약국(FDA)은 여성에게 두 번째로 흔한 약물 부작용이 ‘약효 없음’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여성은 남성과 세포에서부터 다름에도, 의약 분야에서 여성에 대한 임상시험이 거의 이뤄지지 않은 결과다.

저자는 이처럼 여성을 투명인간(Invisible women) 취급하는 ‘젠더 데이터 공백’으로 인해 “인류의 역사, 미술, 문화, 음악, 진화 등은 지금껏 우리에게 객관적 사실로 제시돼왔으나 실제로는 거짓말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인류의 절반에 대한 설명이 누락된 오염된 지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특히 3가지 주제에서 여성과 여성의 삶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할 것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첫 번째는 여체(女體), 더 정확히는 보이지 않는 여체다. 약효 없는 약, 헐거운 안전벨트가 장착된 자동차 등과 같이 여성의 몸에 맞지 않게 설계된 세계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남성의 성폭력이다. 놀랍게도 선진국에서조차 성폭력에 대한 통계는 형편없는 수준이다. 세 번째는 무급 돌봄노동이다. 여성이 무급 돌봄노동의 75%를 감당하는 상황에서 ‘능력에 따른 평등’은 헛구호일 뿐이다.

저자는 “젠더 데이터 공백에서 가장 중요한 점 중 하나는 그게 대개 악의적이지도, 심지어 고의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라며 “그것은 수천 년 동안 존재해 온 사고방식의 산물일 뿐이기에 일종의 무념(無念)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방대한 자료를 동원한 저자의 ‘팩트 체크’를 따라갈수록 웬만한 감수성으로는 ‘무념남’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생각지도 않았던 도처에, 아니 모든 곳에서 여성에 대한 배제와 무시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처럼 가장 확실한 해결책은 “여성 진출의 공백을 메우는 것”이다. 의사결정 과정에, 연구에, 지식 생산에 실질적으로 여성의 참여를 늘리기 위한 행동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남성들이 무념남 수준을 넘어서기 위해 견지해야 할 태도가 있을 것 같다. 데이터 공백을 메우라고 요구하는 여성을 “더럽게 까탈스러운 사람” 취급하지 말고,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464쪽, 1만8500원.

오남석 기자 greente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