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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소 | 고정순 글·그림 | 길벗어린이

“글로 쓸 수 없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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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시소’의 고정순 작가는 프로필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글로 쓸 수 없는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일까. 어마어마한 비밀이 있다면 비밀 유지 차원에서 글로 남길 수 없을 때가 있겠다. 쓰면 더욱 구차해지는 감정도 있고,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어 쓰기 어려울 수도 있다. 어린이들은 자기 마음을 남기고 싶을 때 그림을 선호한다. 글쓰기가 힘겹기도 하지만 지금 감정이 무엇인지 자신도 잘 몰라 그렇게 하기도 한다. 어린이는 글로 쓸 수 없는 이야기가 있을 때 길가 돌멩이를 걷어차거나 골목 끝까지 달려가거나 인형에 얼굴을 파묻고 울어 버리기도 한다.

‘시소’는 이런 어린이의 마음과 공통점이 있다. 작가는 그림책 작업을 통해 세상에 떠다니는 “글로 쓸 수 없는 이야기”의 판본을 수집하고 그 안에 어린이의 몫을 마련해 두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첫 장을 펼치자마자 글로 쓸 수 없는 한 어린이의 고적한 기분과 마주친다. “아무도 없네”는 학교가 끝나고 놀이터에 들른 주인공의 혼잣말이다. 꿀돼지 놀이기구와 코끼리 미끄럼틀에 친구들이 없다. 미끄럼틀은 혼자 탈 수 있지만 시소는 친구가 있어야 한다. 시소 끄트머리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주인공의 가슴께에 알록달록한 색들이 아른거리며 번져 있다. 친구들과 신나게 뛰어놀았던 지난 학기의 기억일 것이다.

그러나 기적은 일어난다. 심심한 주인공이 불어 하늘로 날아간 커다란 비눗방울들이 시소 반대편 자리에 차곡차곡 내려앉는다. 아이가 없어 지루했던 놀이터의 놀이기구들도 코끼리, 돼지, 기린으로 살아나 아이와 마주 앉는다. 그럼에도 판타지는 판타지일 뿐, 혼자 노는 아이의 오후는 너무 길다. 그때 마침내 한 사람, 갈래머리를 묶은 안경 쓴 아이가 걸어온다.

중력을 이용해야만 놀 수 있는 시소는 살아가는 일에 타인의 삶의 무게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고마운 놀이기구다. 이 말은 더없이 무거운 내 삶이 누군가가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발뒤꿈치만 조금 들어줘도 함께 즐거워지는 것이 시소다. 어린이가 친구와 시소를 탈 수 없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작가는 감염병 시대, 친구가 그리운 어린이의 마음을 그림으로 새겨준다. 그리고 그림책을 읽는 어른들에게도 말한다. 당신의 무게가 곧 나의 힘이라고, 오늘도 무거운 당신을 응원하고 기다린다고, 그림으로 말한다. 40쪽, 1만3000원.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