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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깎이 천재들의 비밀 / 데이비드 엡스타인 지음, 이한음 옮김／열린책들

만 한살도 되기전 골프 시작한
타이거 우즈 극히 예외적 사례
동일 패턴이 되풀이해 나타나고
피드백 정확·신속할 때만 유효

스키·수영·야구·축구 등 접한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 같이
적성·관심을 폭넓게 탐사하는
‘샘플링 기간’이 성공의 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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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 ‘1만 시간의 법칙’이 한국 사회를 강타했다. 베스트셀러 작가 맬컴 글래드웰이 ‘아웃라이어’(2008)에 소개하면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이 법칙은 어떤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고 성공하려면 1만 시간의 ‘신중한 훈련(deliberate practice)’을 거쳐야 한다는 내용이다. 신중한 훈련의 핵심은 최상의 방법으로, 동일하거나 비슷한 과제를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때마침 만 한 살도 되기 전에 골프채를 잡았다는 타이거 우즈의 성공이 세계를 놀라게 하던 차에 비슷한 경로를 거친 피겨 여제 김연아는 올림픽 시상대 맨 위에 올라섰다. 이들은 가능한 한 일찍부터 전문적인 훈련으로 성공한 상징적 인물로 떠올랐다.

인간의 학습과 성취의 관계를 파헤쳐 온 데이비드 엡스타인은 저서 ‘늦깎이 천재들의 비밀’(원제 ‘Range’)에서 광범위한 사례 연구를 통해 일찍부터 한 우물만 파는 식의 성공 경로는 극히 예외적이라고 주장한다. 한국 사회에도 만연한 ‘조기 교육, 조기 전문화가 성공의 지름길’이라는 신화에 대한 통렬한 반박이다.

조기 교육 신화의 출발점은 헝가리의 수전·소피아·유디트 폴가르 자매 사례다. 학교도 다니지 않고 체스에 매진한 이들은 10대 때 국가대표로 세계 여성 체스 올림피아드에 출전, 최강 소련 대표팀을 꺾고 우승했다. 이들의 아버지는 자신의 조기 전문화 방식을 1000명의 아이들에게 적용한다면, 인류가 암과 에이즈 같은 난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정신적 방황과 개인적 실험이 힘의 원천이며, 조기 교육의 유리함이 과대평가됐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실제로 우즈와 비슷한 시기에 테니스계를 평정한 로저 페더러는 스키, 레슬링, 수영, 스케이트보드, 야구, 핸드볼, 탁구, 배드민턴, 축구 등 다양한 스포츠를 경험한 뒤에야 테니스의 길로 접어들었다. 빈센트 반 고흐는 화가가 되기 전 미술상, 교사, 서점 점원, 목사, 전도사 등을 거쳤다. 회화의 역사를 바꿨다고 평가받는 고흐의 작품들은 그가 3년만 먼저 죽었어도 창작되지 못했을 운명이었다. ‘해리 포터’ 시리즈로 유명한 작가 J K 롤링도 20대까지는 결혼에 실패하고 복지 수당에 의지해 홀로 자식을 키우는 전직 교사에 불과했다.

저자에 따르면 폴가르 자매와 같은 성공 모델은 ‘친절한(kind) 학습 환경, 즉 동일한 패턴이 되풀이해 나타나고, 피드백이 극도로 정확하며 대개 아주 빨리 이뤄지는 때에만 유효’하다. 그러나 게임의 규칙이 불분명하거나 불완전하고, 반복되는 패턴이 있는지조차 명확하지 않은 사악한(wicked) 환경이 대부분이라는 게 문제다. 이런 환경에서 성공은 이른 출발이 아니라 자신의 적성과 관심을 폭넓게 탐사하는 ‘샘플링 기간’의 유무에 따라 좌우된다. 조기 교육과 반복적인 훈련이 가장 강조되는 스포츠나 예술 영역에서도 경험의 폭, 즉 레인지(range)가 넓은 ‘늦깎이 제너럴리스트’의 성공 사례는 차고 넘친다. 역설적으로 ‘늦은 시작이 궁극적인 성공의 필수요소’인 것이다.

조기 교육, 조기 전문화 경로는 ‘불확실성이 적고 효율성이 높은 깔끔한 처방이기 때문에 매혹적’이지만 ‘우회, 폭, 실험의 역할을 깎아내린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특히 협소한 전문화가 사악한 환경과 결합할 때, 친숙한 패턴의 경험에 의존하려는 인간의 성향은 끔찍한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 집단 전체가 ‘한 우물만 판 개구리’들로 구성될 경우 위험성은 더 커진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 직면했을 때 이를 새로운 탐색의 기회로 삼지 않고 친숙한 지식과 방법에 의존해 그릇된 판단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1986년 우주 왕복선 챌린저호 폭발 사고 당시 나사(미 항공우주국) 전문가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 대형 은행과 금융 전문가들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고도의 자격을 갖춘 전문가들이 실제로는 경험이 쌓일수록 더 편협한 사고방식을 지니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저자는 “우리 모두가 직면한 도전 과제는 초(超)전문화를 점점 더 장려하고 요구하는 세상에서 넓은 폭, 다양한 경험, 학제 간 사고, 지연된 집중 훈련의 혜택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느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뒤처진다고 느끼지 마라” “더 젊은 남들과 비교하지 말고, 오늘의 자신을 어제의 자신과 비교하라” “기꺼이 배우고 수정하고, 필요하면 이전의 계획을 포기하고 완전히 방향을 바꾸기도 하라”. 저자가 남긴 조언이다. ‘한 아이의 인생은 어느 유치원에 들어가느냐에서 결정된다’는 말이 우스갯소리로 들리지 않고, 젊은 층에서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라는 푸념이 쏟아지는 우리 현실에서 저자의 말은 독자들에게 따뜻한 위로로 다가갈 수도 있겠다.

그러나 공동체와 국가 전체로 시야를 넓히면 이는 준엄한 경고일 수밖에 없다. 초등학생 때부터 인생 경로를 확정해 맞춤형 스펙 관리에 나서는 세태, 학제 간 연구는커녕 이른바 ‘정통 코스’를 밟지 않고서는 주류에 편입할 수 없는 배타적인 지식 사회, 예기치 않은 발견을 기다리기보다는 당장 손에 잡히는 성과만 강조하는 학계와 기업 문화…. 이런 풍토가 지속되는 한 친절한 환경이 아닌 사악한 환경에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464쪽, 2만 원.

오남석 기자 greente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