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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식 주필

잘 싸우는 것만큼 후퇴도 작전
戰列 정비 고사하고 오합지졸
의분 휩싸인 逆攻은 전멸 위험

머지않아 ‘1당 폭주’상황 우려
변화에 선제 대응 역량 키우고
젊은 보수로 국민 신뢰 얻어야

전쟁에서든 정치에서든 승패(勝敗)는 수시로 뒤바뀌게 마련이다. 따라서 잘 이기는 것이 우선이지만, 잘 지는 일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의 ‘패배 뒤 후퇴’ 항목에서 다음 원칙들을 제시했다. 패배하면 정신적 힘이 물리적 힘보다 더 많이 꺾인다. 후퇴는 힘의 균형이 회복될 때까지 계속된다. 그 지점은 패배 정도보다 적(敵)의 성격에 더 좌우된다. 형식에 얽매여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재빨리 위험에서 빠져나오는 게 급선무다. 그런 뒤에 병력을 재결집하고, 질서·용기·신뢰를 회복해 반격을 노린다. 단련된 군대는 허둥대지 않고 상처 입은 사자처럼 물러난다.

미래통합당의 진정한 문제는 총선 패배 자체가 아니라 제대로 지지 못한 것이다. 참패 뒤의 오합지졸 행태는 왜 졌는지 말해주고도 남는다. 야당이 죽기 살기로 노력해도 탄핵 3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권력을 회복하긴 어렵다. 공성(攻城)이 수성(守城)보다 훨씬 힘들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론 집권 프리미엄이다. 그런데도 여당은 오히려 최저임금, 52시간제, 정규직화, 남북회담, 친노조, 현금 뿌리기 등 사력을 다했다. 야당은 반대 이외엔 한 일이 없다. 자유·시장·경쟁 등 보수 가치의 장점을 전파하고, 더 나은 대안으로 국민을 설득한 적은 더더욱 없다.

보수 진영이 ‘광화문 10월 혁명’으로 부르는 조국 반대 시위는 그나마 기회였다. 분출한 공정(公正) 요구를 제대로 수용해 젊은 세대와 중도층을 끌어안았어야 했다. 그런데 태극기 부대의 ‘문재인 탄핵’ 투쟁에 주도권을 내주면서 정반대 결과를 자초했다. 지난해 7월 ‘한국당 총선 필패론’ 제목의 이 코너 칼럼에서 필자는 ‘명분 있게 지는 것’이 최선임을 주장하면서, 황교안 당시 대표의 경쟁자 삼고초려, 그림자내각 방식의 의원 역량 키우기와 대안 제시, 문 정권의 코드 인사를 부끄럽게 할 인재 탕평 등을 제안했었다. 그러나 측근 체제 강화 등 거꾸로 움직였다. 공천 실패는 타임아웃 직전의 결정적 자책골이 돼 점수 차를 더 키웠다.

참패 뒤 보름 지났으나 보수 진영은 여전히 ‘멘붕’ 상태다. 일각에서는 투·개표 부정을 제기하고, 일각에서는 나라가 ‘폭망’해 국민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저주도 쏟아낸다. 이해는 간다. 문 정권의 코드 인사와 삼권분립 훼손, 국고 낭비 등을 보면 박근혜 탄핵은 억울하기 짝이 없다. 코로나19를 빌미로 한 현금 살포와 관권 개입 때문에 승리를 강탈당했다. 이런 생각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그러나 의분에 휩싸여 역공에 나서면 전멸할 수 있다. 지금은 후퇴할 때다.

6·25전쟁 영웅인 백선엽 장군과 제2차 세계대전 영웅인 윈스턴 처칠은 후퇴의 달인이기도 하다. 백 장군은 육군 1사단장으로서 낙동강까지 한 달간 후퇴를 지휘하며 미군 주력부대 투입 시간을 벌었는데, 회고록에서 ‘후퇴도 작전’이라며 당시 상황을 전하고 패주와의 차이도 설명했다.(‘군과 나’ 180쪽) 처칠은 영화로도 소개된 ‘덩케르크’ 철수를 성공시켜 반격 토대를 만들었다.

통합당은 영남에서만 명맥을 유지했으니, 정치적으로 6·25 때처럼 ‘낙동강 전선’에 몰린 셈이다. 그러나 ‘위장된 축복’이 될 수도 있다. ‘행동하는 보수’가 등장했고, 보수 이념 전파도 활발해졌다. 강경 보수의 득표 한계가 확인되고, 세대교체 공감대는 넓어졌다. 초거대 여당의 폭주 가능성도 두고 볼 일이다. 이처럼 기회의 문이 곳곳에 열려 있다. 첫 단추는, 변화를 피하지 않고 선제 대응하는 게 보수라는 원칙을 분명히 하는 일이다. 영국 보수당의 선거권 확대, 미국 공화당의 노예해방, 독일 비스마르크 시대의 사회보험 도입 등이 그렇다. 한국에서도 박정희 정권 때 의료보험이 도입됐다.

국회 의석이 부족한 만큼 국민 신뢰를 더 확보해 힘의 균형을 이루는 일이 중요하다. 거대 양당을 누르고 39세에 당선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출사표 겸 저서 ‘혁명’에서 “찬성을 추구하는 사람”을 선언하고, 제목의 과격함과 달리 속삭이듯 긍정의 언어로 설파했다. 반대보다 대안, 부정 아닌 긍정의 정치가 필요하다. 머지않아 ‘1당 독주’에 맞서 싸워야 할 때가 닥칠지 모른다. 그런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목청보다 실력을 키워야 한다. 이를 위해 발상의 전환과 세대의 교체가 급하다. 미숙해 보이더라도 멀리 보고 ‘젊은 보수’를 키워내는 일이 산업화 세대의 마지막 책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