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지식’ 켜켜이 쌓인 곳… ‘젊은 문학’과 공존하다

이미지 크게보기 김병종, ‘파리, 책 읽는 셰익스피어’, 39.5x54.5㎝, 종이에 먹과 채색, 2020년

(29) 파리‘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미국인 여성이 파리에 문 연뒤
세계적 문호들이 드나들던 곳
불멸의 문학 성채로 자리지켜

계단 오를때 나는 ‘뻐걱’소리
기분좋은 종이 냄새 향수 자극

영국과 달리 ‘율리시스’ 판매
오스카 와일드 책 재출판 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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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도시가 품은 지성의 함량과 깊이를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100년 넘은 서점이 몇 개나 되느냐는 것. 나무의 나이테로 수명을 재고 물의 깊이로 수심을 재듯이 서점의 나이로 지성의 깊이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도시뿐이랴. 한 가문의 역사 또한 그 서가를 일별하면 알 수 있게 된다. 수십 년 아니 100년이 넘은 책들이 꽂혀 있는 서가는 범접 못할 어떤 위엄을 느끼게 한다.

적어도 2대, 3대를 거스르며 내려온 지적 편력을 알 수 있기 때문. 그래서 서재는 단순히 책을 모아두는 공간이 아닌 그 집안 지성의 보학(譜學)이다. 그러면 예술도시 파리가 지닌 지성(知性)의 수심(水深)은 얼마나 될까. 우선 그 나이가 130세를 훌쩍 넘은 책방인 질베르 죈(Gilbert Jeune)을 들 수 있겠다.

젊은 학생과 노 교수들이 뒤섞여 분주하게 왕래하는 생미셸 대로에는 파리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유난히 크고 작은 서점이 많이 눈에 띄는데 그중에서도 질베르 죈은 종합적 지식의 전당이라 할 만하다. 가까운 일본으로 치자면 이와나미(岩波), 산세이도(三省堂) 서점 격이라 할까. 거기서는 막 나온 신간과 출판된 지 수십 년씩 된 책이 함께 진열돼 있다. 예컨대 노장과 청년이 하나의 장소에 사이좋게 서 있는 격이다.

서유럽, 아니 세계적 명성을 거느린 또 하나의 서점이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다. 불멸의 문학 성채라 할 만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외관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센강을 왼편에 두고 노트르담 성당 쪽을 바라보며 걷다가 우측으로 약간만 구부러지면 낡은 건물이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그 유명한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다. 명성에 비해 건물은 늙을 대로 늙고 시절 풍상을 다 겪은 듯한 모습이다. 1919년 문을 열었으니 이제 100세를 훌쩍 넘어선 것. 그런데 프랑스 서점의 이름이 왜 하필이면 프랑스에서 영미문학의 대명사처럼 된 셰익스피어였을까. 사정이 없었던 게 아니었다.

처음 이 서점의 문을 연 사람이 프랑스인이 아닌 실비아 비치(Sylvia Beach)라는 미국 여성이었다. 적극적 예술 애호가였던 서점의 주인이 미국인이어서였지 않았을까 유추해볼 뿐이다. 이 서점이 전 유럽과 미국에까지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같은 이름의 문학전문 출판사를 거느리고 거기에서 훗날 세계 문학사를 수놓은 쟁쟁한 작가들의 책이 출판되면서부터였다. 이를테면 작가의 조국인 아일랜드와 영국 등지에서 출판 및 판매가 금지됐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출판·판매하고, 역시 런던에서 참패했던 오스카 와일드의 책을 이곳에서 다시 찍으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버지니아 울프에서 알베르 카뮈, 앙드레 지드에서 멀리 헤밍웨이와 휘트먼까지, 이 서점과 출판사를 거쳐 간 별들은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가 없을 정도다. 처음 문을 연 뒤부터 생겨났다는 아름다운 전통 하나. 서점의 맨 위층을 숙소로 해놓고 작가와 작품 애호가들에게는 돈을 받지 않고 잠자리를 제공해준다는 것. 그렇게 해서 에어비앤비처럼 이곳을 거쳐 간 사람이 무려 4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내가 방문했을 때 적지 않은 관광객이 서점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놀랍게도 30∼40대는 물론 20대, 심지어 10대로 보이는 모습까지 있었다. 문학은 죽지 않았구나 싶었는데 속내를 알고 보니 문학보다는 영화 팬이었던 것. 바로 ‘비포 선셋(2004)’에서 남녀 주인공이 우여곡절 끝에 오랜 세월 후 감동적으로 재회한 곳이 바로 여기였다는 사실. 고전적 문학의 메카로서보다는 그렇게 달달한 사랑과 낭만의 장소로 더 많이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전편인 ‘비포 선라이즈(1995)’에서 대책 없는 여행자로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됐던 제시와 셀린. 수년 후 제시는 상당한 성공을 거둔 작가로 이름을 알리게 되고 바로 이 서점에서 독자 사인회를 하게 되는데, 이미 유부남인 제시와 아직도 싱글인 셀린은 이곳에서의 만남을 두 사람의 운명으로 받아들인다는, 어쩌면 이 서점을 두고 이야기가 짜 맞춰진 듯한 바로 그 현장이었다. 어느 노랫말처럼 모든 것이 변해간다. 너무 빨리 변해간다. 서점도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 이제 동네 책방들은 하나둘 사라지고 일반 상품을 파는 백화점처럼 휘황한 조명의 대형 북마켓으로 바뀌어버렸다. 서점에 들어설 때의 푸근한 느낌, 코끝으로 지나가는 기분 좋은 종이 냄새 같은 것을 기대할 수 없게 됐다.

이미지 크게보기 화가·서울대 명예교수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계단을 걸어 올라갈 때면 여기저기서 오래된 나무가 관절처럼 삐걱대는 소리를 내는 곳. 늙은 책과 새로 나온 책이 서가에서 서로 어깨를 의지하며 그렇게 놓여 있는 곳. 문학에의 짝사랑으로 열병을 앓던 그 옛날로 되돌아간 듯, 그리하여 나야말로 이곳에서 옛 연인을 재회하듯, 그렇게 설렘으로 옛날 책방을 만난다.

화가·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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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넘은 영미문학 전문서점…헤밍웨이·버지니아 울프 등 책 출간

파리 제5구 뷔셰리 거리(Rue de la Bucherie)에 있는 유명한 문학전문 서점이다.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앙드레 지드 등 당대 최고의 영미문학가들이 이 서점이 거느린 동일한 명칭의 출판사에서 책을 찍어 내었다. 1919년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파리에 온 미국의 영미문학 애호가 실비아 비치(Sylvia Beach, 1887∼1962)에 의해 문을 연 이래 100년이 넘게 영미문학 전문출판의 외길을 걸어왔다.

특히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Ulysses·1922)’를 비롯, 미국에서 출판 금지됐던 로런스(D H Lawrence)의 책이 이곳에서 출판돼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나치의 프랑스 점거 후 잠시 문을 닫았지만 1950년대에 조지 휘트먼(George Whitman·1912∼2011)의 책이 다시 출간되면서 그 전통이 이어졌다.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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