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단색화, ‘파이프 화가’ 통해 세계의 시선을 잡다

이미지 크게보기 이승조의 1980년 작품인 핵(Nucleus) 80-07(230×133㎝)과 1969년 작품인 Nucleus G-99(161×130㎝, 오른쪽). 이승조는 ‘핵’ 연작을 통해 ‘미학의 본질’을 규명하려고 했다.

- 이승조 재조명展 잇달아

뉴욕서 내달 4일까지 전시회
독특한 평면·터질듯 입체감
6월엔 현대미술관서 회고전

“韓작가 이제야 합당한 대접”
현지 비평가들 호평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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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프의 화가’로 불리며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한 단색화가 이승조(1941∼1990·사진)가 세계 미술계에서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뉴욕 ‘티나 킴’ 갤러리에서 4월 4일까지 열리는 그의 전시에 대해 현지 비평가들은 ‘한국 작가들이 이제 작품에 합당한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며 호평하고 있다. 대규모 이승조 회고전도 6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다.

한국적 추상화의 대명사인 단색화는 서양의 모노크롬(monochrome), 일본의 모노하(物派)와 비견되며 최근 세계 미술 시장에서 각광 받아왔다. 단색화는 김환기(1913∼1974), 윤형근(1928∼2007), 박서보(1931∼), 정상화(1932∼), 하종현(1935∼), 이우환(1936∼)으로 이어지는데 이 같은 계보에서 한발 비켜나 있는 이승조에 대한 관심은 단색화의 범주를 확장시킨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해외에서 ‘단색화 거장’으로 통하는 박서보는 이승조의 작품을 두고 ‘미래의 한국미술’이라고 평할 만큼 그는 독특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평면’을 채워나갔다.

단색화는 1970년대 초반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화단의 대표적인 미술 장르로 자리 잡았다. 서양의 모노크롬과는 다르게 단색화는 ‘색’보다는 ‘제작 과정’을 중요시한다. 행위의 반복, 물성(物性)과 정신(精神)의 결합 등 ‘수행’을 연상시키는 작업을 통해 작품을 만들어냈다.

박서보의 ‘묘법’ 연작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캔버스에 물감으로 밑칠하고 그것이 채 마르기도 전에 연필로 선을 긋고, 또 물감으로 지워버리고, 다시 그 위에 선을 긋는 행위를 되풀이하는 과정을 통해 작품을 완성한다. 말 그대로 ‘수행’이다. 따라서 대부분 단색화가의 캔버스에는 인물이나 정물, 자연풍경 등 그림 속 인식 대상인 오브제는 안 보이고 비워진 여백에 작가의 혼이 담긴 ‘캔버스와 물감’의 ‘물성’만이 남아 있다. 그처럼 단색화만이 지닌 특성 때문인지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이후 ‘단색화 = 한국적 추상’으로 화단의 조명을 받으며 수십 배씩 가격이 급등하며 미술시장을 선도해나갔다.

그러면 이전의 단색화가들과 달리 캔버스 위에 오브제의 하나인 파이프 모양의 기하학적 문양을 가득 그려 넣은 이승조의 그림들은 왜 ‘단색화’로 분류될까.

여기에는 단색화의 미학에 대한 평론가들의 견해가 밑바탕에 있다. 그들에 따르면 단색화가 추구한 것은 원근법에 의존한 그림 속 사물들을 화면에서 비워냄으로써 이를 통해 회화의 본질을 규명하려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승조는 동시대의 단색조 화가들의 미학과 같지만 그것의 실현 방식은 독창적이었다.

이승조의 작품에는 ‘바탕’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비우지 않고 거꾸로 가득 채워’ 넣었다. 기존의 단색화 화가들이 물감으로 캔버스를 가득 채워 ‘오브제’를 배제했다면, 한발 더 나아가 이승조는 터질듯한 입체감의 파이프들로 그림의 지지체인 캔버스의 바탕을 아예 가려버렸다.

이런 그의 작업은 196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파이프가 슬그머니 경계를 흐리며 바탕으로 빨려 들어가는 ‘바림법(gradation)’으로 그려져 있다. 파이프는 ‘그려진’ 것인 동시에 ‘바탕’이다. 사실 미술관을 찾은 관객들은 캔버스 위에 그려진 사과만 보고 그 사과가 그려진 바탕은 안 본다. 그러나 바탕이 없으면 대상도 없다. 게다가 바탕 위 사과도 허상이다.

이승조의 의문도 그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을 통해 ‘그려진 사물의 조형미에 감탄해야 한다’는 ‘그림에 대한 종교적 믿음’에 경종을 울렸다.

미술평론가 정준모 씨는 “그의 작품은 기하학적인 추상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려진 파이프가 만들어내는 환영적인 회화의 허구를 보여줌으로써 단색조 회화의 이념을 그만의 방식으로 실천에 옮겼다”고 평가했다.

이승조는 홍익대와 홍익대 대학원에서 수학한 후 ‘오리진’과 ‘한국아방가르드협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국전에 도전해 4회의 특선 중 두 번이나 문공부장관상을 받으면서 추천작가와 초대작가를 따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90년 4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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