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여러 개의 책상 위에 6대의 컴퓨터와 각종 모바일 기기가 놓여 있어 마치 우주선 조종실을 연상하게 하는 이어령의 집필실. 신창섭 기자

■ 米壽의 이어령

이어령의 다변(多辯)에 관해서는, 그의 여러 지인 그리고 인터뷰를 해본 기자들이 심지어 ‘질렸다’는 표현을 한다. 또 예전에도 경험했지만, 그의 기(氣)에 눌리고 사통팔달의 달변에 끌려다니다 보면 애초 구상한 인터뷰 질문지는 소용없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번 인터뷰에선 그의 다변이 뭉클한 반가움으로 다가왔다. 지금 병환에 대해 직접 치료는 하지 않고 있다는데, ‘스타트렉’의 우주선 조종실 같은 서재에서 매일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일상은 변함이 없다고 했다. 막을 수 없는 호기심과 ‘창조 강박증’도 수그러들지 않았다는 거다. 작은 일에도 만난 이들을 배려하는 세심하고 따뜻한 모습도 여전했다.

이번에 인터뷰하며 몇 번 반복했던 말 하나는 “이렇게 (기사가) 나가면 진영 논리에 말리는 거 아닌가?”였다. ‘그놈에’ 진영 논리가 우리의 르네상스적 지식인의 유일한 문지방인가. 이어령의 문학적 지향은 줄곧 같았지만, 진영의 틈바구니에서 이리저리 재단돼왔고 이리저리 배제돼왔다. 이런 조건은 어쩌면 그를 친-반체제가 강요하는 세상에서 비체제의 새 답안을 찾아 지식의 최전선으로 더욱 채찍질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내가 병을 얻어 그걸로 당황하진 않았는데, 이제 시간이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보는 눈이나 생각이 확 달라지더라”는 말도 했다. “사실 8세에 이미 나는 다 만들어진 겁니다. 부모로 해서 내 생명과 접촉하고 내가 겪은 역사·문화와 관계없이, 한국 사람이기 이전에 나는 물고기이고 진핵세포이고 그보다 이전에 빅뱅의 물질이 부딪혀 만들어진 파편, 장구한 우주쇼에서 생겨난 겁니다. 정치나 역사는 우주에서 볼 때 작은 곤충만도 못하게 보이겠지요.”

알려졌다시피 그는 늦은 나이에 기독교에 귀의했다.

“예술가는 인간이면서도 인간을 초월하는 상상력을 가졌기 때문에, 초월적 상상력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초월적 신의 세계와 통합니다. 동시에 아슬아슬한 문지방을 못 넘어갑니다. 예술은 감각을 매개로 하는데, 감각의 육체를 뛰어넘으려면 힘이 듭니다. 그래서 문학 하는 사람이 종교에 빠져 도그마에 들어가면 글을 더 이상 못씁니다. 나는 문학과 종교 사이의 문지방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중이에요.”

―계속 건강하셔서 80대와 20대가 함께 힘을 합쳐 내일을 여는 모델이 돼 주셔야지요.

“절망하다가도 각 분야에서 활약하는 개인과 젊은이들의 놀라운 재능을 보고 있으면 구한말 때 한국을 취재하러 온 영국 매켄지 기자의 말을 생각하게 됩니다. ‘한국인은 싸움할 만한 심각한 이유가 없는 한 싸움을 싫어하는 민족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한없이 온순하지만은 않다. 한번 마음을 먹으면 이들은 호랑이를 몽둥이로 때려잡는 용감한 사람들이다.’ 나는 한국인을 믿어요.”

엄주엽 문화부 선임기자 ejyeob@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