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서울역 고가공원은 기차 여행의 아스라한 추억들을 떠올리게 해 주지만, 길 가득 들어찬 화분 형태의 콘크리트가 답답한 느낌을 준다. 곽성호 기자

■ (12) 서울역 고가공원

佛 파리 12구역 고가철도 공원
美 뉴욕 맨해튼 하이라인 파크
그곳에서 느꼈음 직한 정서에
나는 쉽게 젖지 못한 채 걸었다

길을 가득 메운 대형 콘크리트들
여백의 미학을 능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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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고가공원을 같이 걸으며 남은 이야기를 하자는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 친구는 ‘서울역 고가’라는 말만 듣고도 고개를 살살 흔든다. 서울시가 고가의 대변신을 상징하는 빼곡한 발 그림을 고가 난간에 걸었던 순간부터 “그 조잡한 이미지에 질렸”노라며, 친구는 다시 한 번 완강히 거절한다. 둘 다 대화가 미진한 느낌이지만, 나는 오늘 걷기로 한 날이다. 살다 보면 반드시 걸어야만 할 것 같은 날이 있다. 머릿속을 탈탈 털어내고 경쾌하게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은 그런 순간들이다.

가방 속엔 바꾸려고 챙겨 나온 스카프도 있지만, 나는 친구와 헤어져 지척에 있는 백화점을 등지고 걷는다. 설 선물로 스카프를 준 사람의 말이 귀에 쟁쟁 울린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꿔서라도 꼭 네가 하고 다녀!”라던 말. 고개를 흔들며 사라진 친구처럼 나도 고개를 저어 귀를 털며 서울역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서울역이 내려다보이는 고가로 향하는 발걸음이라서 그런지 머릿속에서는 벌써 반짝이는 레일과 추억이 있는 수많은 기차역이 떠오른다. 폭설로 차가 끊긴 국도를 온 가족이 함께 걸어 기차를 타러 갔던 어릴 적 일이며, 가까운 사람들의 경조사로 시끌벅적했던 여행의 추억…. 서울역 고가공원의 모델이 되었다는 뉴욕의 ‘하이라인’을 달리던 기차와 그 기찻길을 오가던 노동자들의 애환까지도 조금씩 상상된다.

숭례문에 이르자 지방에 사는 소꿉친구와 그녀의 큰딸이 떠오른다. 친구의 큰딸은 작년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우리 집에 와서 잠깐 머물며 임용고시를 준비했다. 엄마를 그대로 닮은 그 아이는 그해 합격했다. 그 아이가 아직 청소년일 때 남대문이 방화로 소실되었다. 남대문이 불타는 장면을 뉴스로 보면서 그 아이는 눈물을 철철 흘렸다고 한다. 대체 왜 그렇게 슬피 우는 거냐고 달래며 물었더니 “나는 아직 가 보지도 못한 남대문인데…나는 아직 보지도 못했는데…” 하며 더 구슬피 울었다던 아이. 그 아이가 어떤 스승으로 성장할지 궁금하지만, 그건 본인에게도 미지의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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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심 차게 걸어 고가 위에 섰지만, 나는 알 수 없는 답답함을 느낀다. 그 때문에 빠른 걸음으로 고가 위를 한 번 오간 뒤, 천천히 다시 걷는다. 고가 철도를 이용해 공원을 만들었다는 이국의 공원(파리 12구역)이나 이곳의 모델이 된 맨해튼의 하이라인 파크를 오가는 사람들이라면 느꼈음 직한 정서에 나는 쉽게 젖지 못한다.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사라진 강렬한 친구의 영상을 떠올리며 생각 끝에 나름의 이유를 찾아낸다. 길 가득 들이찬 화분 형태의 대형 콘크리트 때문이다. 그걸 의식하자마자 과거에 이곳을 오가던 차량들보다 더한 하중을 고가가 견디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름엔 몸을 부풀리는 나무들 때문에 시야가 더 답답해질 것이다.

헐렁한 공간 위에서 우리가 사는 곳을 관망하는 시원한 눈맛을 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다. 1㎞도 안 되는 이 거리에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나지막한 벤치 몇 개뿐일 거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확신으로 인해 아이들을 위한 놀이 기구와 여러 대의 피아노도 좀 거슬린다. 조금 과장하자면, 가재도구가 가득 차 발 디딜 틈이라고 없는 부엌과 커다란 장롱 때문에 문을 여닫을 수 없는 작은 방을 보는 것처럼 답답하다. 공간을 가득 채우는 미학이 여백의 미학을 능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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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나는 서울역이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지점에서 오래된 기억을 떠올린다. 언젠가 어머니와 나는 명의를 만나러 서울로 왔고, 서울역 앞에 서 있었다. 마흔을 갓 넘긴 어머니와 아직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지 않은 딸. 그때도 이미 서울은 매연이 가득했고, 긴 여행에 지친 나는 숨을 쉴 수 없다며 계속 짜증을 냈다. 화를 내야 하는 순간에 제대로 화를 낼 줄 아는 사람에 비해 매사에 짜증을 내는 사람의 품격이 얼마나 떨어지는지 나는 요즘 꽤 자주 깨닫는다.

중리동, 청파동, 세종대로, 남산, 만리동, 숭례문, 서울역 앞 등 17개 보행도로를 잇는 공원에서 나의 발길은 망설임 없이 백범광장으로 향한다. 두 달 전 걸었던 몽촌토성에서 마주쳤던 ‘김구의 묘’를 기억하던 나의 시선은 처음부터 그리로 향하는 이정표에 머물렀고, 몸이 움직였다. 몽촌토성에서 김구의 묘를 보고 깜짝 놀란 나는 “왜 김구의 묘가 여기 와 있지?”라며 계속 어리둥절해했다. 같이 걷던 친구가 “단종의 김구겠지?”라고 했을 때까지도 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한국사를 전공한 그 친구가 직관했던 대로 몽촌토성에 묻혀 있는 인물은 노산군의 복권을 적극적으로 주장했고, 노론과 소론의 격렬한 대립을 완화하는 데 힘쓴 김구(1649∼1704)였다.

남산도서관이 있는 남산순환도로를 수없이 지나다녔지만, 백범공원을 걸어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남산자락에 서서 내려다보는 시선의 편안함을 즐기고 있을 때 어느 길에 걸렸던 글이 떠오른다.

“높은 곳에서 일할 때의 어려움은 글씨가 바른지 비뚤어졌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물어보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낮은 곳. 거기가 내가 중심 잡고 살아가야 할 장소임을 조용히 자각하는 순간이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