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자주 환상이 안보 허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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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前 국방부 장관

김정은 ‘정면돌파 노선’ 제시
도발 위협하며 제재 해제 요구
그러나 경제적 내구력은 2~3년

지난 500년 外侵 교훈 선명한데
文정부 들어 안보 全方位 위기
국민이 깨어나야 나라 지킨다

새해에는 모두가 밝은 미래를 희망하고 있지만 지난 몇 년간의 암울한 현실이 개선되기보다는 더욱 악화할 것 같은 불안감을 부정하긴 어렵다. 며칠 전 한국국가전략연구원과 미국의 브루킹스연구소가 주최한 국제회의에서 한·미 전문가들은 북한의 비핵화는 실패했고, 한·미 양국 정부가 국내정치적 목적을 위해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이라는 환상에 계속 매달리는 것을 우려했다.

지난해 말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정은은 ‘정면돌파 노선’을 제시했다. 미국이 북한의 발전권과 생존권 보장을 선조치하지 않으면 더 이상 협상은 없다면서, 국제적 제재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자력갱생과 ‘고난의 행군’ 준비를 강조하고, 그간 유예했던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실험을 재개할 수 있으며 전략무기 개발사업도 적극 추진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북한 경제 전문가들은 국제 제재가 계속되면 북한의 경제적 내구력이 2∼3년 정도일 것으로 판단한다.

신년 기자회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낙관론을 펼치면서 국제사회로부터 대북 제재를 면제·완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남북 협력사업을 추진하고 미·북 대화까지 견인하겠다는 구상을 제시했다. 이는 한국과 미국의 대북정책을 분리하겠다는 것으로, 한·미 간 긴밀한 조율과 한·미·일간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보는 미국 정부의 입장에서 수용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다. 북한의 최대 피해국인 한국 정부가 어떻게든 국제 제재의 구멍을 찾을 궁리만 하는 모습이 국제사회에 어떻게 보일지 우려된다.

북한 비핵화를 목표로 다양한 노력이 시작되던 시기의 상황과 오늘의 현실을 비교해 보면, 국제 제재의 대상으로 중국·러시아와의 관계도 거의 단절돼 있던 북한은 미국 대통령과 3번씩 만나고 친서를 주고받는 관계로 발전했고 중·러의 지원도 받게 됐지만, 한국은 대북 문제에 있어 미국과 이견이 노출되는 등 한·미 동맹 관계가 흔들리고 있다. 또, 중국으로부터도 정상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고 한·일 관계도 심각하게 악화했다. 또한, 북한은 우리 정부를 힐난하고 면박을 주면서 협상의 상대로 고려하지 않고 있어, 일각에서는 한국 정부가 5면 초가(楚歌)의 상황에 빠져 있다고 평가한다.

왜 이러한 결과가 나왔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결정적인 잘못은 우리 정부와 국민에게 있지 않을까? 지정학적으로 우리나라는 매우 어려운 여건에 놓여 있다. 세계 초강대국들로 둘러싸인 동북아에서 우리는 현실을 심각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정부와 많은 정치인의 행보를 보면 국제 상황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이에 따른 대처보다는 국내 유권자들의 평가를 훨씬 더 중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 뜻을 따르는 것이 민주주의 국가라지만, 진정한 국가 리더십은 국가가 처한 현실을 냉철히 평가하고 이에 따라 국가의 미래를 설계해야 하며, 이를 국민에게 설명하고 설득해 그 방향으로 국가를 이끌어야 한다. 그런데 대개는 유권자들을 쉽게 흥분시킬 수 있는 임시방편식 정책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선거에서의 승리를 추구한다.

그러면 결국 국가의 실질적 주인인 국민이 깨어나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현명하게 판단해야 한다. 대다수 국민은 지난 500여 년간 겪었던 외침(外侵)에 의한 여러 차례의 전쟁과 국권 상실로 불행했던 과거의 영향으로 ‘통일’ ‘평화’ ‘자주’라는 개념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주한 미국 대사가 ‘한국 정부가 제재를 촉발할 수 있는 오해를 피해야 한다’고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자, 청와대와 여당이 “대사가 총독이냐”고 비난하고, 통일부는 마치 대사가 우리의 주권을 침해한 것처럼 발표하고, 반미 시위대가 극단적 행동을 하는 것은 이러한 국민적 경향과 정치권의 판단에 따라 전개되는 게 아닐까?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과 당시 조선의 현실과 역사를 평가한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가 내린 결론처럼 예나 지금이나 주변 강대국들의 위세는 여전하고, 그 틈새에 낀 한반도의 처지 또한 크게 변한 게 없다. 그런데도 뿌리 깊은 배타주의와 정치적 이기주의, 엄청난 자기부정은 단군 이래 최초의 번영과 자존을 누리는 요즘도 그 행태가 바뀔 줄 모르는 것 같다. 국가의 리더십과 국민이 변화할 때 진정한 북한의 비핵화와 한반도의 평화가 신기루가 아닌 현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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