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1961년 마스터스를 제패한 게리 플레이어(오른쪽)가 아널드 파머가 입혀준 그린재킷을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마스터스 첫 외국인 우승자 등극
파머도 못한 커리어 그랜드슬램

1960년대 아널드 파머라는 걸출한 TV 스타로 나타났다. 그리고 미국의 골프무대에 또 다른 혜성이 등장했다. 미국인이 아닌 멀리 아프리카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날아온 ‘흑표범’ 게리 플레이어다. 파머처럼 잘 생긴 외모는 아니다. 작고 왜소한 체구. 그런 플레이어가 한 시대를 풍미하며 미국골프를 이끌어 갈 수 있었던 배경은 1961년 미국프로골프(PGA)투어 메이저대회인 마스터스였다.

우승 상금 2만 달러가 걸린 제25회 마스터스 마지막 날, 그러니까 1961년 4월 10일 미국 조지아주 오거스타내셔널골프클럽. 변덕스러운 날씨로 인해 장대비가 쏟아졌다. 오후 4시가 되자 그린은 물론 페어웨이까지도 잠기면서 홍수경보까지 울릴 기세였다. 오거스타내셔널골프클럽은 몇몇 선수가 경기를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스코어를 무효로 처리하고 다음 날 재경기하겠다고 선언했다.

그해 마스터스는 첫날부터 파머와 플레이어의 대결이었다. 전년도 챔피언이었던 파머는 첫날 4언더파를 챙기면서 선두로 치고 나왔고 플레이어는 1타 뒤진 3위로 시작했으나 2라운드 선전으로 인해 파머와 함께 7언더파로 공동선두를 형성했다. 그러나 3일째 파머가 1타를 잃어 중간합계 6언더파로 내려앉았고, 플레이어는 3타를 줄여 10언더파로 단독선두가 됐다. 플레이어는 11번 홀까지 타수를 줄이지 못했지만, 파머는 비가 오는 와중에도 2타를 줄여 1타 차로 따라붙었다. 파머로선 4라운드 취소가 억울했다. 하지만 오거스타내셔널골프클럽의 지시에 따라야만 됐다. 플레이어는 1959년 이미 브리티시오픈에서 우승했고 미국에서 첫 메이저대회 사냥을 노리고 있었다.

월요일 재개된 4라운드에서 파머는 디펜딩 챔피언다운 면모를 과시하기 시작했다. 날씨는 화창했고 마스터스의 갤러리인 패트런은 파머를 일방적으로 응원했다. 비록 플레이어가 첫 홀 버디로 5타 차로 달아났지만, 파머의 추격은 끈질겼다. ‘아멘코너’의 13번 홀을 통과하면서 파머는 플레이어와 9언더파로 동타가 됐고 15번 홀에서 버디를 낚아 1타 차로 되레 앞섰다. 17번 홀까지 1타 차로 앞섰기에 마지막 18번 홀만 지키면 파머가 2연패를 이룰 수 있는 상황.

이미지 크게보기 이인세 골프역사칼럼니스트

마지막 한 홀 남은 플레이어로선 연장전에 가려면 버디가 필요했다. 파머는 티샷을 페어웨이에 보냈고, 이젠 그린에 올려 2퍼트만 하면 마스터스 2연패를 달성하기에 의기양양했다. 하지만 ‘신의 질투’ 때문이었을까. 파머의 두 번째 샷은 그린 오른쪽 벙커에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공이 벙커 경사면에 놓여 있었다. 이 사이 플레이어는 2온 2퍼트, 파로 마쳤다. ‘3온 1퍼트’로 목표를 수정했던 파머가 벙커에서 친 공은 그린을 넘어 반대편 언덕 아래로 굴렀고 패트런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파머가 퍼터를 잡고 친 공이 홀 앞 3m나 못 미쳐 보기마저 장담키 어려웠다. 파머는 신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는 듯 하늘을 한번 쳐다봤다. 공은 홀을 외면했고 이렇게 더블보기가 나왔다.

어부지리로 우승한 플레이어는 쑥스러운 듯 파머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이날 승리로 플레이어는 마스터스 사상 첫 외국인 우승자로 등록됐다. 이후 플레이어는 파머와 함께 1960년대를 이끌어가며 몇 년 뒤 조인하는 잭 니클라우스(미국)와 함께 ‘빅3’를 형성한다.

게다가 플레이어는 파머가 이루지 못한 현대적 의미의 ‘커리어 그랜드슬램’도 달성한다. 플레이어는 이후 1962년 PGA챔피언십, 1965년 US오픈까지 정상에 올라 4대 메이저대회를 석권했다. 골프 역사상 진 사라센, 벤 호건(미국)에 이어 3번째 그랜드 슬래머가 된 것이다. 이후 니클라우스, 타이거 우즈(미국)가 가세해 오직 5명만이 영광을 누렸다.

골프역사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