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선유도공원에 가면 서울을 품고 있는 한강이 한겨울에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낄 수 있다. 아래 사진은 옛 정수처리장의 흔적이 남아 있는 모습. 신창섭 기자

(11) 선유도공원

빗물정수장 이용한 생태공원서
물처럼 흐르는 세월을 떠올려

미루나무 아래서 걸음 멈추면
반짝이는 강에 입 맞댄 하늘이…
거센 바람 맞아도 머리는 쾌청

아쉬움이 남는 연말이고, 기분 탓일까. 우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띈다. 젊은 친구도, 나이 많은 친구도, 부자인 친구도 하나같이 우울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다. 기분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시작해도 모두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라 여기는 듯하다. 본인이 얼마나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좀 위험해 보인다. 우울증이 있는 사람이 자신의 우울을 감지하는 것만으로도 치료가 시작된다고 하건만.

이미지 크게보기

선유도공원으로 발길을 옮길 때 조선시대 선비 이경전의 ‘노호승설마기’라는 글이 떠올랐다. 아버지(이산해)가 지은 노량진의 작은 집에서 우울하게 연말을 보내던 이경전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친구들과 썰매를 타고 지금의 양화대교 너머까지 달려갔다. 1631년의 설날을 며칠 앞둔 한겨울이었다. 선유도공원의 선유봉을 지나갔던 그날의 썰매놀이가 얼마나 즐거웠던지, 이경전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등불을 밝혀놓고 두고두고 기억하기 위해 그 일을 글로 남겼다. 그의 나이 65세 때였다. 하룻밤의 유쾌한 썰매놀이가 회복의 단초가 됐기 때문일까. 그 뒤 그는 형조판서를 지내며 노익장을 과시한 뒤 12년을 더 살다 세상을 떠났다.

걸어서 양화대교를 건너던 나는 선유도공원 입구에서 한 마리의 길고양이와 마주친다. 누군가가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환경에서 살고 있는 고독해 보이는 고양이. 순간, 생각난다. 한 출판사의 대표가 선유도공원에서 주말마다 길고양이들에게 급식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글을 통해 좀 알고 있다고 생각되던 그의 이야기는 꽤 뭉클하다.

이미지 크게보기

앞에서 언급한 이경전의 글에는 한겨울의 한강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한 묘사가 생생하다. 한강 변에 늘어선 크고 작은 정자마다 ‘설음식을 만들거나 삶을 고뇌하느라’ 불을 환히 밝히고 있다는 표현도 보인다. 그의 글은 짧지만, 하인들이 화로를 들고 나타나 꽝꽝 얼어붙은 한강 위에서 음식을 데우고, 기생까지 합류해 풍류를 즐기는 장면도 있다. 그처럼 자세하게 묘사되는 썰매놀이지만, 뜻밖에도 썰매를 끌었던 네 아이에 대한 언급은 일절 보이지 않는다. 썰매놀이 도입부에 “어디선가 아이들이 참새처럼 뛰어와 썰매를 끌기 시작했다”는 짧은 문장만 있을 뿐이다. 그들의 썰매길을 자꾸 눈으로 좇게 되는 지금, 노인들의 썰매를 끌었던 네 명의 아이들도 함께 행복했기를 바란다. 화로에 데운 따뜻한 음식을 노인들이 선뜻 덜어서 아이들에게도 다정히 건넸기를 바란다. 기생의 노래와 춤도 순진무구한 아이들의 눈에 마냥 아름답게 보였기를!

고전의 기억까지 떠올라 낭만을 더해주는 한강을 만끽하기에 선유도공원만 한 장소가 있을까. 한 방향으로 몰아치는 겨울바람에 익숙해질 때쯤 머릿속이 말할 수 없이 쾌청해져 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빛이 눈부셔 평지에서는 일부러 눈을 감고 걸어본다. 눈을 감으면 다가오는 풍경들은 하나같이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미래를 이처럼 구체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다른 차원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돌이켜보니 이십 대의 나는 한강을 여러 번 걸어서 건넌 적이 있다. 뭔가를 배우러 다니던 시절이었다. ‘오늘은 차를 타고 가야지’ 했다가도 나는 일찍부터 서두르며 걸어갈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곤 했다. 그렇게 걸어서 건넜던 한강 위의 시간이 바람결에 실려 온다.

이미지 크게보기

빗물정수장을 그대로 이용한 생태공원 선유도에서 나는 흘러가는 세월과 고여 있는 세월을 오직 물을 통해 고찰한다. 그러다 나무계단을 오르고, 도시에서는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미루나무 아래서 걸음을 멈춘다. 앙상한 나뭇가지를 자물쇠처럼 잡고 있는 마른 나뭇잎을 기어이 떨어뜨리고 말겠다는 기세의 바람에서 시선을 떼면, 반짝이는 강물에 커다란 입을 맞대고 있는 하늘이 보인다.

수생식물이 녹색 기운을 내뿜는 계절의 이 장소도 아름다울 테지만, 겨울엔 겨울다운 맛이 있다. 지구 환경에 관심이 많은 나는 이곳이 생태 복원을 지향하고 있음을 환기하며 걷다가 다시 다리 위에 서 있다. 몇 번씩 멈추며 건너온 양화대교가 아닌 보행자 전용 선유도교 위다. 이곳에서 보는 한강은 또 다른 느낌이다. 수많은 문학 텍스트에서 봤던 센강이 한강에 비해 보잘것없다고 느꼈던 삼십 대의 나도, 잘 늙는 것이 화두인 나도, 어린 시절의 나도 함께 다리 위에 서 있다. 인간은 쇠락하는 세월 속으로 흘러가건만 한강은 점점 젊어지고 있다.

‘공간은 미련을 갖지 않는다. 시간도 미련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육체는 앞으로만 가는 시간을 거꾸로 걸어간다. 아무리 설득해도 나의 육체는 말을 듣지 않는다.’(김진영의 ‘이별의 푸가’). 과거지향적인 육체를 가진 나는 지금, 좁디좁은 내 집을 벗어나 가슴을 활짝 펴고 폐를 부풀린다. 치유의 바늘 같은 바람이 따끔하게 몸에 꽂히는 기분 좋은 날이다!

선유도교를 건너가 커피를 한잔 마시고, 인접해 있는 두 초등학교 교정으로 들어가 잠시 기웃거린다. 그러다 차를 타고 양화대교 위에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선유도는 걸어 다닐 때보다 훨씬 포괄적으로 보인다. 저 섬에 미래 환경에 대한 의지가 있음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