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두고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중앙당사의 현판을 떼고 있다.

이미지 크게보기 2016년 20대 총선에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전북 익산 유세에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연합뉴스·자료사진

■ 역대 야당 대표들의 ‘총선 승부수’

추미애 ‘탄핵사죄 삼보일배’·한명숙 ‘朴때리기 일관’… 黨 참패 못막아
‘투사이미지’ 변신 시도 황교안 ‘21代’ 결과에 정치 운명 좌우

정치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이란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력과 관성을 깨는 유연성, 승부사적 기질과 앞장서 끌어가는 힘, 협치의 미덕 등 셀 수 없이 많다. 정권의 독주를 견제하면서 대안도 제시해야 하는 야당 지도자에겐 보다 엄격한 자질이 요구되기 마련이다.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은 부족한 반면 여당 프리미엄과 유권자들의 안정 희구 심리 등 여권에 유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서 승부를 펼쳐야 하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역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야당 지도자는 늘 승부수를 띄우곤 했다. 당대표의 최고 권한이랄 수 있는 공천권을 내려놨던 2016년의 문재인 대통령(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수백억 원대 중앙당사를 국고에 헌납하고 천막당사를 택했던 2004년의 박근혜 전 대통령(당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 등은 ‘기득권 포기’ 리더십으로 성공을 거둔 케이스다. 반면 유력한 여당 차기 대권주자였던 박 전 대통령의 대항마를 자처하며 야권 지지층 결집을 꾀한 2012년의 한명숙 전 국무총리(당시 민주통합당 대표),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 속에 삼보일배로 참회의 유세를 펼친 2004년의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의원(당시 새천년민주당 선거대책본부장) 등은 선거 패배의 멍에를 뒤집어쓰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야당 리더의 진정성이 유권자들에게 어필하는지 여부에서 이 같은 차이의 원인을 찾는다.

이제 관심은 내년 21대 총선을 앞두고 삭발과 단식 투쟁 등 평소 이미지와 판이하게 ‘투사’로 거듭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의 운명에 쏠린다. 황 대표의 진정성은 유권자의 마음에 가닿을 것인가. 이는 이번 총선을 흥미롭게 하는 대목 중 하나다.

◇성공한 야당 리더… 2016년 문재인, 2004년 박근혜 = 지난 2016년 20대 총선을 앞둔 당시 새정치민주연합(민주당의 전신) 대표였던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의당과의 분당 사태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자 사실상 백의종군으로 돌파를 시도했다. 여당이던 새누리당(한국당의 전신)이 공천 과정에서 ‘진박(진짜 친박근혜) 감별 논란’ 등 자중지란에 빠졌음에도, 야권이 둘로 쪼개지면서 총선 전망이 극도로 어두웠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박근혜 경제 가정교사’였던 김종인 전 의원에게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기면서 당 운영에서부터 공천에 이르는 전권을 넘겼다. 당시 문 대통령은 “전권을 달라”고 요구한 김 비대위원장에게 “하고 싶은 대로 하시라”고 한 뒤 2선으로 후퇴했다. 당시 문 대통령의 결단이 없었다면 새정치연합이 20대 총선에서 127석을 확보하며 제1당에 오르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란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실제로 문 대통령에게서 전권을 넘겨받은 김 전 비대위원장은 친문(친문재인)·친노(친노무현) 가리지 않고 공천 쇄신의 칼을 휘둘렀다. 현재 민주당 1인자인 이해찬 대표를 포함해 친노 원로그룹인 문희상 국회의장과 유인태 국회 사무총장, 문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과 강기정 청와대 정무수석, 대중적 인지도가 높았던 정청래 전 의원 등이 당시 공천에서 모조리 배제됐다. ‘물갈이’와 함께 진행된 인재 영입은 대중에게 더욱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표창원 경찰대 교수, 김병관 웹젠 대표, 김정우 세종대 행정학과 교수, 이철희 시사평론가, 박주민 변호사,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양향자 전 삼성전자 상무 등이 분야별 전문성을 인정받아 영입됐다. 이들은 새정치연합이 총선에서 승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2004년 17대 총선에 임박해 한나라당(한국당의 전신) 비대위원장을 맡은 박근혜 전 대통령도 성공한 야당 리더로 꼽힌다. 당시 총선에 앞서 진행된 검찰의 2002년 대선자금 수사로 한나라당은 ‘차떼기 정당’이란 오명을 뒤집어썼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을 무리하게 추진했던 것은 쓰나미를 연상케 하는 거센 역풍으로 이어졌다. 개헌 저지선(300석 가운데 120석) 확보도 어렵다는 비관적인 전망이 신문 지상에 오르내릴 정도였다. 이런 시기에 비대위원장을 맡은 박 전 대통령은 여의도 당사와 당 연수원을 내놓는 것에서 새 출발을 다짐했다. 천막당사를 만들고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각오로 새 인물 영입에 공을 들였다. ‘부패한 정당’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기소된 당원은 당원권을 정지하고 유죄가 확정되면 영구 제명하는 등 위법 행위에 대한 징계 시스템도 강화했다. 30명에 이르는 의원의 불출마 선언도 이어졌다. 불출마를 결단한 의원 중 다수는 보수 정당의 텃밭인 영남 지역의 중진들로, 싸늘하게 식었던 민심을 되돌리는 데 적잖은 공을 세웠다는 평가가 나왔다.

박 전 대통령의 리더십은 17대 총선에서 121석 확보라는 성과로 이어졌다. 기껏해야 80석 정도 채울 것이란 예상과 달리 한나라당은 단독으로 개헌 저지선을 확보,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미지 크게보기 추미애 새천년민주당 선거대책본부장이 삼보일배를 하고 있다.

◇비운의 리더… 2012년 한명숙, 2004년 추미애 = 반면 한명숙 전 총리는 2012년 19대 총선을 3개월여 앞두고 민주통합당(민주당의 전신) 대표에 선출됐다. 그해 12월에는 18대 대선이 예정돼 있던 만큼 한 전 총리의 책무는 총선 승리를 이끌어 냄으로써 정권 탈환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한 전 총리의 전략은 ‘박근혜 때리기’였다. 총선을 이명박 정부와의 싸움인 동시에 당시 여권의 가장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였던 박 전 대통령과의 싸움으로 설정한 것이다. 한 전 총리 스스로도 야권의 차기 주자 중 한 명이었던 만큼, 초반에는 이 같은 전략이 먹히는 듯했다. 민주통합당 지지율이 새누리당을 앞섰고, 헌정 사상 처음으로 전국단위 선거에서 야권 연대를 이뤄내는 성과도 거뒀다.

그러나 한 전 총리의 리더십은 강한 야당을 만드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 저축은행 불법 자금 수수 의혹으로 기소된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당시 전 의원)을 사무총장에 기용한 것을 둘러싸고 공개적인 반발이 터져 나오는 등 민주통합당은 내분과 계파 갈등에 휘말렸다. 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은 새누리당(152석)의 과반 의석 확보를 저지하지 못한 채 127석에 그쳤고, 한 전 총리는 패배의 책임을 지고 89일 만에 물러났다.

2004년 17대 총선 당시 추미애 의원 역시 처절한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당의 참패를 막지 못한 비운의 리더로 남았다. 추 의원은 한나라당과 합세해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을 추진했다 너덜너덜해진 새천년민주당의 선대본부장을 맡았다. 추 의원은 2002년 대선 당시 국민참여운동본부장을 맡아 노 전 대통령 당선에 큰 공을 세웠던 인물. 그러나 추 의원 역시 당초 ‘노 전 대통령 탄핵 불가’ 방침을 펼치다 막판에 입장을 바꾸면서 노 전 대통령 지지자들의 분노를 샀다. 당이 휩쓸려 가는 위기 속에 추 의원은 탄핵 동참에 대한 사죄의 뜻으로 광주 금남로부터 5·18 망월동 묘역까지 15㎞에 이르는 구간에서 삼보일배 유세를 펼쳤다. 그 과정에서 무릎 연골을 다쳐 이후에도 굽이 있는 구두를 신지 못할 만큼 큰 후유증이 남았다. 그러나 총선 결과는 새천년민주당의 참패와 추 의원 본인의 낙선이었다. 탄핵의 후폭풍을 혹독하게 겪은 그는 미국으로 2년여간 유학길에 오르며 정치권을 잠시 떠났다.

이미지 크게보기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지난 11월 22일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에서 단식 농성을 벌이고 있다. 뉴시스

◇‘투사’로 거듭난 2019년의 황교안, 그의 운명은?= 지난 1월 한국당에 입당, 2월 당 대표에 오른 뒤 11개월이 지나는 동안 황교안 대표는 몇 번의 이미지 변신을 시도했다. 임기 초반에는 짙은 관료 이미지를 덜어내고 대중에게 친근한 이미지를 각인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구두 대신 운동화를 신고, 주름이 잡히게 다린 재킷 대신 편안한 점퍼를 입어 외관상으로도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국무총리, 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낸 황 대표에게 ‘야당 대표가 가져야 할 투쟁력이 부족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적지 않았다.

이런 황 대표의 이미지에 획기적인 변화가 나타난 것은 ‘조국(전 법무부 장관) 사태’를 겪으면서부터다. 모두의 예상을 깬 삭발과 8일간의 단식 투쟁을 통해 ‘투사형 정치인’으로 탈바꿈했다. 원외 당 대표가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농성이나 장외 투쟁 등으로 넘어서려고 하는 것이다. 황 대표가 단식 투쟁에 들어가면서 당 안팎에서 분출하던 리더십 논란이 잠잠해지는 효과도 있었다. 최근에는 지역구 의원 3분의 1 컷오프, 현역 의원 절반 ‘물갈이’ 등 과감한 공천 혁신 계획을 내놓으면서 강한 야당 대표 이미지를 쌓아가고 있다.

그러나 황 대표의 변신이 성공을 거둬 총선 승리로까지 이어질지에 대해선 여전히 회의적인 시선이 많다. 실제로 황 대표는 ‘공관병 갑질’ 논란의 주인공이었던 박찬주 전 육군 대장을 영입하려다 ‘공감능력 떨어지는 리더십’이라는 비판을 샀다. 나경원 전 원내대표의 임기 연장 불가 결정, 당직 개편 등의 과정에서는 ‘독단적 리더십’ ‘제왕적 리더십’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이 때문에 일부 의원 사이에선 “황 대표로는 총선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전문가들도 황 대표가 본인의 거취까지도 과감하게 내려놓는 결단을 보여야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주문을 내놓는다. 이현출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야당 지도자에게는 정치력과 결단력이 필수”라며 “황 대표에게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남들이 따라오도록 만드는 정치력과 사적인 이익을 버릴 수 있는 결단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유진 기자 klu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