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러시아 스타트업(창업기업) 개발자들이 지난 11월 19일 모스크바 근교 스콜코보 혁신센터에 위치한 테크노파크의 한 회의실에서 최신 정보기술(IT) 흐름에 대한 세미나를 경청하고 있다. 김남석 기자

■ ‘러시아의 실리콘밸리’ 스콜코보를 가다

푸틴 집권 이후 국가 차원 지원
설립 8년만에 1조2855억 매출
필립스 등 글로벌기업만 100개
삼성-LG전자 ‘AI 센터’ 설립
현대차는 미래차 개발 협약도

러,에너지 의존 경제체제 탈피
제조업 중심 산업구조로 전환

“스콜코보(Skolkovo) 혁신센터에는 설립 이후 약 1만 개 스타트업(창업기업)이 입주를 신청해 현재 2000개 정도 기업이 상주하고 있습니다. 통계적으로 다섯 개 중 한 개 기업이 심사를 통과해 러시아 연방법상 주어지는 세제 혜택 등을 받고 있습니다.”

‘러시아판 실리콘밸리’ 스콜코보 혁신센터 알렉산드라 바르체프스카야 부사장의 설명이다. 스콜코보 혁신센터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국가적으로 박차를 가하고 있는 프로젝트다.

지난 11월 19일 오전 러시아 모스크바 도심에서 서쪽으로 20㎞가량 떨어진 지역에 자리 잡은 혁신센터에 도착했다. 대학캠퍼스 여러 개를 합쳐놓은 듯한 400만㎡ 부지 곳곳에는 크레인이 바쁘게 움직이며 크고 작은 연구동을 세우는 광경이 눈에 띄었다. 부지 중심에 놓인 복합연구·개발(R&D)센터 스콜코보 테크노파크에 들어서자 컨벤션센터를 방불케 하는 넓은 공간에 회의실·전시공간(쇼룸)·카페 등으로 사용되는 14개 캡슐형 구조물 사이로 편한 복장의 개발자들이 오가고 있었다. 한쪽 쇼룸에는 스콜코보 입주 업체인 호버서프가 개발한 최대 속도 시속 70㎞의 1인용 드론 오토바이 호버바이크가 전시돼 있었다. 지하 1층으로 내려가자 공용 업무·개발공간에 모여든 개발자들이 3D프린터, 정밀기계장비 등 고가의 장비를 활용해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시제품으로 구현하기 위해 분주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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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미래에 사활 건 푸틴 = 2010년 러시아의 제조업 육성책의 일환으로 출범한 스콜코보 혁신센터는 설립 8년 만인 지난해 입주 기업들이 696억 루블(1조2855억 원)의 매출액을 기록했다. 정부 예산과 46개 파트너 벤처펀드를 통해 입주 기업 및 인프라 구축 등에 투입된 금액만 러시아 전체 벤처투자액의 40%에 달하는 332억 루블에 달했다. 이와 함께 필립스, 토탈, 에어버스, 화웨이, 가스프롬 등 100여 개에 달하는 글로벌 기업이 스콜코보 혁신센터에 입주하거나 제휴관계를 맺고 미래기술 개발에 매달리고 있다. 국내에서도 삼성전자, LG전자가 각각 인공지능(AI)센터를 설립하거나 입주 스타트업과 기술협력을 진행하고 있다. 현대자동차 러시아법인도 지난 5월 미래차 개발을 위한 모빌리티랩을 설립했다. 스콜코보의 성공적 안착에 고무된 러시아는 제2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에 하이파크를 세울 예정이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도 극동연방대를 중심으로 혁신센터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전통적인 수학·기초과학 강국으로 꼽히는 러시아는 정보기술(IT) 산업 육성은 물론 IT를 기존 산업에 접목하는 4차 산업혁명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이를 위해 러시아 정부는 2017년 7월 ‘2025 러시아 디지털 경제’ 비전을 발표하면서 IT 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2006년 첨단기술 기업을 지원하는 국영 러시아벤처컴퍼니(RVC)를 설립해 현재까지 189개 기업에 175억 루블을 투자했는데 28.59%가 IT 및 인터넷 기술·서비스 분야에 집중됐다. 또 러시아 정부는 AI, 빅데이터, 블록체인 등 10대 핵심기술을 선정하고 2017년부터 2020년까지 78억 루블의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계획이다. 민간 부문을 중심으로 한 성과도 나타나고 있다. 러시아의 구글로 불리는 얀덱스는 검색엔진을 기반으로 모바일 서비스를 확충하고 있다. 또 사이버보안 플랫폼 등을 중심으로 글로벌시장에서 주목받는 스타트업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164개 회원사를 거느린 러시아 최대 소프트웨어개발사 협회인 러스소프트(Russoft)의 발렌틴 마카로프 회장은 기자와 만나 “2007년 이후 정부가 본격적으로 IT 기업 육성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면서 러시아 IT 기업들의 경쟁력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이미지 크게보기 러시아 스콜코보 혁신센터 내 공용업무 공간에서 개발자들이 3D 프린터 등 비치된 장비를 활용해 시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자원의 저주에서 벗어나라 = 러시아 정부가 천문학적 예산을 들여 스콜코보 혁신센터를 설립하고 부가세(20%), 소득세 등 각종 세제 혜택을 쏟아붓는 이유는 고질적인 자원·에너지 의존 경제를 탈피하고 제조업 중심 산업구조를 달성하기 위해서다. 러시아는 현재 가스 등 에너지 부문이 국내총생산(GDP)의 10%, 수출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전형적인 자원·에너지 의존형 경제구조다. 2017년 기준 석유·가스산업은 같은 기간 러시아 전체 GDP의 16%를 점유하는 동시에 전체 수출의 54%, 연방 재정수입의 40%를 차지했다. 이 같은 에너지·자원의존형은 원유·천연가스(LNG) 가격이 상승할 경우 막대한 수입을 올리며 호황을 누리지만 유가가 하락하거나 수출길이 막힐 경우 국가 경제 전체가 직격탄을 맞게 된다. 호황기에도 통화가치 급등, 임금 및 물가상승 등으로 관련 산업을 제외한 제조업 분야 경쟁력을 상실하는 이른바 ‘자원의 저주(Dutch disease)’ 현상을 피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안정적 에너지 수출을 위해 2일 개통한 러시아∼중국 간 ‘시베리아의 힘’ 가스관 건설을 비롯해 발트해 해저를 통과해 독일까지 연결하는 ‘노드스트림2’ 가스관 건설 추진 등 국가적 차원에서 자원·에너지 수출망 다변화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형국이다.

러시아는 보다 근본적인 산업구조 개편을 위해 제조업 육성에도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대표적 제조업 육성책은 2015년 1월 발표한 경제위기 대응계획이다. 연 3억 달러의 산업개발펀드 조성, 신규 제조설비 투자기업 저금리 지원, 정부간거래(GtoG) 특별투자협약 체결 시 대폭적인 세제 혜택 등을 핵심 내용으로 한다. 러시아 정부는 이를 통해 2020년까지 제조업 자립 비율을 60%까지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2016년에는 러시아 연방기술개발공사를 설립해 기계, 엔지니어링, 농업, 의약, 에너지 효율, 정보통신기술(ICT) 등 수입의존율이 높은 산업 분야부터 선진기술 도입에 나섰다.

◇아시아로의 회귀 = 푸틴 대통령이 야심 차게 추진하는 또 하나의 국가프로젝트는 러시아 내에서 상대적으로 낙후된 극동지역 개발을 위한 신동방정책이다. 푸틴 대통령은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라고도 불리는 신동방정책을 위해 2012년 정부 내에 극동개발부를 신설했다. 2016년부터는 국제행사인 ‘동방경제포럼’을 매년 개최하며 한국을 비롯해 중국, 일본 등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투자 유치에 나서고 있다.

특히 러시아의 신동방정책은 문재인 정부가 출범 후 추진 중인 신북방정책 및 남·북·러 3각 산업협력 등과도 맞물려 주목받고 있다. 다만, 북한 핵개발 및 대북 제재 등이 걸림돌이 되면서 한·러 산업협력 역시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상준 국민대 유라시아학과 교수는 “한국이 너무 남·북·러 3각 협력에 매달리다 보니 오히려 양국 간 경제협력도 가시적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며 “러시아 입장에서는 2014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합병사태를 이유로 한 미국·유럽·일본의 대러 제재에 동참하지 않은 한국과의 협력을 보다 강하게 원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 = 김남석 기자 namdol@munhwa.com

※ 본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19 KPF 디플로마 ‘러시아전문가’ 과정 참여 후 제작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