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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워싱턴 특파원

니키 헤일리 전 유엔 주재 미국 대사는 최근 출간한 회고록 ‘외람된 말이지만’(With all due respect)에서 존 켈리 전 백악관 비서실장과 렉스 틸러슨 전 국무장관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을 막으려 한 사실을 밝혔다. 헤일리 전 대사는 책에서 “켈리와 틸러슨은 대통령에게 저항할 때 불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구하려 노력하는 것이라고 내게 털어놨다”며 이들의 행동을 대통령에 대한 배신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헤일리 대사가 트럼프 대통령 후광에 기대 차기 대권을 노리고 있음을 감안하고 이 주장을 보면, 실제로 두 사람은 트럼프 대통령의 좌충우돌을 막으려 고군분투한 사실이 읽힌다. 켈리 전 비서실장과 틸러슨 전 장관은 허버트 맥매스터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제임스 매티스 전 국방장관과 함께 ‘어른들의 축’으로 불리며 균형추 역할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들을 경질한 뒤 이란,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등 각종 외교 정책에서 난국에 빠져 있다.

헤일리 전 대사 회고록이 떠오른 건 문재인 정부가 일본과의 갈등에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카드를 꺼내 들었다가 진퇴양난에 처한 모습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해 10월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을 둘러싼 갈등이 경제문제로 번지자 미국의 힘으로 일본을 압박하려 지소미아 종료를 꺼냈다. 그런데 지소미아 카드는 오히려 미국이 일본과 같은 편에 서서 한국을 압박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지소미아 종료를 앞두고 미군 수뇌부는 일제히 한국을 찾아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다. 마크 밀리 미 합참의장은 12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의 회담 후 “지소미아 기한이 끝날 때까지 해결하겠다”고 말한 데 이어 14일 한·미 동맹 만찬에서 지소미아 문제를 논의했다고 밝혔다. 마크 에스퍼 미 국방장관도 15일 한미안보협의회의(SCM) 후 기자회견에서 “지소미아 종료로 이득을 보는 곳은 중국과 북한”이라고 강조했다. 미국 내 정치권과 전문가들 역시 지소미아 유지에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애덤 스미스(민주·워싱턴DC) 하원 군사위원장은 13일 “지소미아 갱신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미국이 지소미아 문제를 놓고 한국을 압박하는 이유는 일본의 수출제한 조치는 한·일 간 경제문제인 반면, 지소미아 종료는 미국의 국가안보 전략에 직접적인 균열을 가져오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소미아 종료가 가져올 후폭풍, 한·미 관계가 벼랑 끝으로 향하는 상황은 이미 오래전부터 한국 내 전문가들도 제기한 우려였다. 하지만 이 상황이 오기까지 누군가 자리를 걸고 대통령을 말리려 했다는 이야기도, 출구전략 마련에 나서고 있다는 말도 들리지 않는다. 최근 한 미국 언론은 어른들의 축이 물러나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듣기 좋은 소리 하는 관료들만 남은 상황을 지적하며 “트럼프 시대의 트레이드마크는 ‘아첨’(sycophancy)이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문재인 정부에도 트레이드마크를 붙인다면 ‘폭주’가 어울릴 거라는 생각이 든다. 지소미아 종료 결정처럼 각종 정책에서 악영향과 실패가 눈앞에 펼쳐지는데도 청와대와 부처 내에 제동 페달을 밟는 이 하나 없이 서로 나서 가속 페달만 밟고 있는 상황에 이보다 들어맞는 말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