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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크게보기 서울 올림픽공원의 ‘세계 평화의 문’. 시인은 이곳에서 시작해 성내천을 해자처럼 두르고 있는 백제 왕도의 남성(南城), 몽촌토성(위 큰 사진)을 걸었다. 김낙중 기자

(9) 몽촌토성

흙기운 그립다는 친구의 말에
이상한 결핍감의 정체 짐작해
성내천이 둘러싼 몽촌토성으로

南城·北城 이뤄진 백제의 왕도
사방의 고층 건물과 가을 하늘
우정을 이야기하며 ‘두런두런’

한옥에서 살다 이사한 지 2년. 과거와는 달리 이상한 결핍감을 자주 느낀다. 딱히 뭐라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하루도 쾌청하지 않은 몸에서 울려대는 경보음인 것도 같다. 흙 기운이 그립다는 친구의 말을 통화 중에 들었을 때, 온종일 따라다니는 이상한 결핍감의 정체를 어렴풋이 짐작했다.

성곽이나 요새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 중 하나는 ‘함락되지 않은 성이나 요새가 있었을까?’이다. 왠지 없을 것 같은데 세계 곳곳엔 그런 곳이 있고, 우리나라의 죽주산성과 삼년산성 등도 함락된 적이 없는 성이다. 그럼에도 나는 인간의 욕망이 머문 곳이라면 내부의 적에 의해서라도 함락되지 않은 요충지란 없을 것이며, 쇠락 역시 세월에 의한 함락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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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천을 해자처럼 두른 몽촌토성의 시작점에는 올림픽공원이 있다. 88올림픽에 맞춰 세워진 ‘세계 평화의 문’ 앞에서 한국사를 전공한 친구와 합류한다. 만나자마자 우리는 이 구조물에 든 48억 원이라는 공사비를 가늠해 본다. 또한 오방색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나눈다. 프랑스의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수제자였다는 김중업의 건축사무소에 근무하며 ‘세계 평화의 문’을 설계한 건축사는 언젠가 ‘조은 시인의 집’을 디자인해 자신의 작품집에 수록했다. 청와대 근처에 이사하고 싶은 작은 집이 있어 그에게 의견을 물은 것이 발단이었다. 그는 그 집을 사서 새로 지으면, 근사한 4층 건물로 거듭날 수 있다면서 설계도면까지 그려 주며 나의 구매 의욕을 부추겼다. 도면은 일본 출신의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안도 다다오를 세계적인 건축가로 만든 사람도 김중업의 스승 르코르뷔지에이다)의 출세작인 작은 집을 능가할 정도로 훌륭해 보였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셋집을 전전하는 중이다. 언젠가는 그 건축가로부터 토기 하나를 선물로 받았다. 그에게서 20년, 내게서 20년을 보낸 그 고려토기는 이제 나를 떠나 한 공예가의 작업공간에 놓여 있다.

학자들은 백제의 왕도는 북성과 남성으로 이뤄져 있으며, 남성을 몽촌토성(남한산에서 뻗어 내려온 낮은 구릉 끝자락에 쌓은 산성), 북성을 풍납토성(한강을 서쪽에 끼고 쌓은 평지 토성)으로 보고 있다. 백제의 초기 왕정이었다는 하남위례성의 구릉을 보자마자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오늘은 박물관에도 들어가지 말고 걷기만 하자!”며 의견이 일치한다. 걸으면서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북성인 풍납토성까지 단숨에 걸어갈 수도 있었을, 사라진 젊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려운 고비마다 옆에서 지켜봤던 오랜 우정과 앞으로의 우정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눈을 돌려보니 사방으로 둘러쳐진 고층 건물과 파란 가을 하늘이 타원형의 성곽 안에 푹 잠겨 있는 나에게 묘한 기시감을 준다. 이런 느낌은 토성 축조 당시 성안에 있던 몽촌마을에서 살던 자의 유전자가 몸 안에 있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으로 뻗어가고, 우리의 대화는 축성 당시 동원됐을 노동력에 대한 애환으로 바뀐다.

토성에서 머무는 세 시간.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나무늘보처럼 걷는 우리를 앞지른다. 우리는 몸이 불편해 보이는 사람과 노인만을 앞지른다. 다리가 휘거나 등이 굽은 사람, 통증이 있어 보이는 골반을 두 손으로 받치고 걷는 사람들이다. 그러다 경주마 같은 허벅지 근육을 꿈틀대며 걷는 청춘에게서 시선을 떨어뜨리지 못한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허리가 잘록한 여성의 얼굴이 궁금하다고 생각되는 순간, 시선이 통제되지 않는다. 풋풋하고 아름다운 청춘에게서 무관심한 척 시선을 거두기란 너무도 힘들다. 그들을 얼마든지 눈으로 좇아갈 수 있는 내가 남자가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인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애써 피해 갔던 칠지도가 그려진 목조 계단을 마지막엔 내려선다. 백제가 369년에 제작해 왜에 하사했다는 일곱 개의 칼날을 가진 칠지도. 양날의 칠지도는 이소노카미 신궁에 봉안됐다. 돌이켜보니 성장기에 나는 역사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 때문에 외우기만 하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과목에서 늘 바닥을 기고 있었다. 고대사든 근대사든, 세계사든 한국사든, 인간의 역사에 깔린 살육과 강탈에는 아무리 애써도 흥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파란만장한 왕족들과 그들 삶의 반전 또한 나는 너끈히 소화할 수 없었다. 그것은 내면이 약한 자의 모습이었다. 용량이 큰 사람들이 부드럽고 온화한 모습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할 때마다 나는 얼마나 열등감을 느껴야만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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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영양소를 충분히 섭취한 뒤에도 떠나지 않는 허기증은 정말로 부족한 흙 기운 때문일까. 어쨌거나 그동안 나의 발길은 시멘트 길을 따라서만 걷고 있었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구릉지를 이용해 축조된 토성만 해도 인간에게 꼭 필요한 흙 기운을 받기에 적합한 장소이고, 조금만 움직이면 정체된 정신까지 휘저어주는 빛과 바람으로 가득한 장소에 닿을 수 있었건만…. 적당한 높이의 언덕에서 느낄 수 있는 편안한 눈맛. 흙을 푹 덮고 누운 듯한 낮은 지형에서 느껴지는 대지의 기운. 오늘은 몇 시간 걷는 것만으로도 푸석거리는 일상을 위로받기에 충분했다. 가을 하늘은 맑았고, 집까지 따라온 나의 하늘도 쾌청했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