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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해에 서식하는 드래건피시
검정 페인트보다 수십배 검어

인간이 만들어 낸 ‘반타블랙’
막대같은 탄소 나노튜브 빽빽

깊은 바다에 사는 드래건피시는 몸 색깔이 유달리 까맣다. 작년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무려 99.9%의 빛을 흡수한다고 한다. 검은색 페인트보다도 수십 배 더 검다는 뜻이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깊은 바다 암흑 속에서, 이토록 검은 몸을 갖게 된 까닭은 뭘까. 바닷속 1000m 아래에는 햇빛이 전혀 도달하지 않는다. 따라서 광합성을 바랄 수 없고, 식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깊은 바닷속이야말로 검디검다.

이런 심해에는 우리 눈에 신기한 생명체가 많다. 나름 잘 알려진 초롱아귀는 발광기관을 머리 위에 초롱처럼 달고 다닌다. 실은 심해 생물의 절반 이상이 어떻게든 빛을 낼 수 있다고 한다. 초롱아귀 같은 물고기뿐만 아니라 문어, 새우, 박테리아까지. 검은 우주에서 무수한 별이 빛나듯, 검은 바닷속 여기저기도 생명으로 반짝인다.

이렇게 빛이 존재함으로써, 검은색도 의미를 되찾는다. 빛을 쏘아 먹이를 찾는 포식자에게 드래건피시는 보이지 않는 존재다. 몸에 닿는 빛 알갱이들을 모조리 흡수해버리기 때문이다. 포식자는 자신이 쏜 빛 알갱이가 하염없이 어딘가를 향해 가는 중인지, 아니면 드래건피시에게 흡수돼 버린 것인지 알아챌 수가 없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빛 알갱이가 없기 때문이다. 심해에서 검은색은 드래건피시의 은폐색이 된다.

드래건피시에 버금가는 검은 생명체를 땅 위에서 찾는다면 뉴기니 지역에 사는 어깨걸이풍조가 손에 꼽힌다. 암컷 앞을 방정맞게 뛰어다니며 구애할 때 펼쳐 보이는 수컷의 날개는 99.95% 빛을 흡수한다. 까마귀 같은 다른 검은 새보다 열 배 내지 백배 더 검다는 뜻이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어깨걸이풍조의 날개 깃털은 유난히 복잡한 미세구조로 가득했다. 깃털에 닿은 빛 알갱이는 이 미세구조 속에 빠져 이리저리 튕겨 다니다가 결국 흡수돼 버린다.

인간이 만들어 낸 검은색과 비교하면 어떨까. 2014년에 영국 서레이 나노시스템스에서 개발한 반타블랙(Vantablack)이란 물질은 99.965%의 흡수율을 자랑한다. 드래건피시나 어깨걸이풍조보다 검다. 이 물질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막대같이 생긴 탄소 나노튜브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어깨걸이풍조 날개의 구조처럼 한 번 들어온 빛 알갱이는 안에 갇힌 채 빠져나가지 못하고 결국 흡수된다. 반타블랙으로 코팅한 물체를 마주하면 시각적 혼란에 빠진다고 한다. 마치 공간에 검은 구멍이라도 뚫린 듯 보이기 때문이다. 반사되는 빛이 없어서 사람 눈으로 물체의 형태를 읽을 수가 없다. 어떠한 모양의 3D 물체를 가져와도 2D 평면의 부재로 보일 뿐이다.

지난 몇 년간 지구 상에서 가장 검은 존재로 이름을 날리던 반타블랙은 바로 지난달에 새 챔피언에게 타이틀을 물려줬다. 매사추세츠공대(MIT) 연구진이 자그마치 99.995% 빛을 흡수하는 물질을 만들어 낸 것이다. 역시 탄소 나노튜브를 이용한 작품이다. 보다 완벽에 가까운 검정을 창조하려는 과학자들의 집착은 이런저런 쓸모도 있다. 그중 하나가 우주를 바라보고 별을 관찰할 때다.

1990년에 쏘아 올린 후 지금껏 지구 상공에서 우주를 내다보는 허블 망원경. 그 내부는 99% 빛을 흡수하는 물질로 코팅돼 새까맣다. 주변 아무 데서나 날아온 빛 알갱이들이 망원경 내부에 들어서면, 여기저기 튕겨 다니며 이미지를 흐리는 대신 검은 벽에 부딪쳐 흡수돼 사라진다. 덕분에 희미한 별도 다른 빛에 방해받지 않고 관찰할 수 있다. 색의 부재, 빛의 소멸을 통해 우리는 더 멀리, 더 희미한 것을 보게 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