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숫자, 의학을 지배하다’는 증세가 나타나지 않으면 질병으로 보지 않던 만성질환이 제약업계에 의해 수치화돼 질병으로 규정되면서 잠재적 환자를 양산하는 역효과가 일어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문화일보DB

- 숫자, 의학을 지배하다 / 제러미 A 그린 지음, 김명진 등 옮김 / 뿌리와이파리

고혈압·당뇨·고콜레스테롤…
공식적 치료 없었던 만성증세
수치화 하여 병으로 규정해

심장병·신부전증 예방했지만
잠재적 환자 양산 역효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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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80㎜Hg. 단위는 낯설어도 왠지 숫자는 익숙하지 않은가. 맞는다. ‘정상’ 혈압 수치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높거나 낮으면 병원은 곧바로 조치에 들어간다. 의사는 규칙적으로 운동하라는 말 끝에 조금만 더 높으면(낮으면) 약을 먹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혈압뿐만이 아니다. 현대인의 몸 상태는 각종 숫자로 표현되고, 그 오차 범위를 넘어서면 곧바로 무슨 약이든 먹어야만 한다. 미국 존스홉킨스 의대 의학사 교수인 저자는 책에서 이런 상황을 “‘약을 통한 예방’이라는 현대의학의 교의”가 지배하는 사회로 규정한다. 저자는 고혈압과 다이우릴, 당뇨와 오리네이스, 고콜레스테롤과 메바코의 사례를 들어 ‘예방과 관리’라는 명목으로 제약산업이 현대인의 삶을 지배한 역사를 밝혀낸다.

약을 통한 예방은 긍정적인 측면이 많지만 “의학지식을 생산하고 배포하며 실제 의료행위로 옮기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시장’과 얽힐 수밖에 없다. 시장을 움직일 힘이 있는 제약회사들은 “마케팅과 역학(疫學)의 융합”을 도모하며 힘을 키웠다. 이들이 제시하는 숫자, 즉 정상 수치가 곧 건강의 척도로 올라선 것이다. 고혈압은 1940년대 말까지만 해도 진정제를 투여하는 것 외에 별다른 치료 방법이 없었다. 별다른 증세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많아 병으로 인정하지 않을 때이기도 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20년 동안 비약적으로 발전한 제약회사들은 “다이우릴이 항고혈압제로 최고”라며 각종 간행물을 통해 홍보하면서 건강을 걱정하는 대중의 심리를 파고들었다. 이 과정에서 여전히 이견이 많지만, 확장기 혈압이 90㎜Hg를 넘으면 고혈압으로 약을 처방받아야 한다는 인식도 함께 커졌다.

‘당뇨’하면 보통 인슐린을 생각하지만, 공식적으로 치료받지 않았던 당뇨병 환자들을 의학적 치료 대상으로 끌어들인 약이 있다. 경구용 당뇨병약 오리네이스는 만성병을 ‘멈출 수 없는 퇴행 모델’이 아닌 ‘감시와 조기 검진 모델’로 바꾼 촉매제였다. 다이우릴과 함께 오리네이스는 “자신의 병증을 모르는 사람들의 검사와 치료를 공중보건에서 우선순위로 만드는 운동에 활기”를 제공했다. 3500년 전 파피루스에도 증상이 나타나고, 이미 18세기에 당뇨(glycosuria)라고 명명될 정도로 연원이 깊은 당뇨병은, 1920년대 초 인슐린이 등장하기 전까지 단식요법 외에는 별다른 치료법이 없었다.

업계는 오리네이스가 소아 당뇨에 거의 효과가 없고, 비교적 가벼운 당뇨병 진단을 받은 고연령 비만 환자에게만 효과가 있는 상황을 우려했다. 오리네이스가 “오직 가벼운 증세에만 듣는 인슐린의 보잘것없는 대체품”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우려는 곧 새로운 마케팅 기법으로 극복됐다. “오리네이스에 반응하는 당뇨병”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냄으로써 오리네이스는 “하루아침에 경구용 혈당강하제의 대명사”가 됐다. 이후 오리네이스는 “편리성뿐 아니라 우수한 안정성”을 광고 전면에 내세우며 승승장구했다. 1968년 전국민건강조사 자료에 따르면 “알려진 당뇨병 환자 전체에서 4분의 3 넘는 사람이 경구용 혈당강하제로 치료”받을 정도였다.

콜레스테롤이 어떻게 건강을 위협하는지 정확한 메커니즘은 몰라도, 심혈관 질환을 예방하고 수명을 늘리려면 콜레스테롤 섭취를 피하고 혈류 속 콜레스테롤양을 줄여야 한다는 것 정도는 상식으로 알고 있다. 현대인들에게 큰 근심거리 중 하나가 된 콜레스테롤은 메바코라는 약의 역사와 중첩된다. 고콜레스테롤은 고혈압과 함께 1950년대 이후 심장질환의 확실한 전조로 인식됐다. 하지만 고혈압약과 당뇨병약에 비해 고콜레스테롤을 이겨낼 약은 비교적 늦게 선보였다. 1987년 출시된 메바코는 국가콜레스테롤교육프로그램과 연결되면서 입소문을 탔다. “국가적인 콜레스테롤 검진 및 치료 지침”이 나왔고, 메바코는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기적의 약”으로까지 치켜세워졌다.

저자가 우려하는 것은 질병과 사회, 개인의 특수성보다 “약이 질병 범주의 정의에서 중심 동인이 됐다”는 사실이다. 물론 “위험성을 낮춰주는 약을 꾸준히 복용함으로써 증상 없는 수많은 환자 집단이 심장병, 뇌졸중, 실명, 신부전 예방에서 눈에 띄는 이득”을 얻었다. 그럼에도 약을 중심으로 질병이 정의되고, 그에 따라 치료가 이뤄지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몇몇 제약회사가 주도하는 이 같은 상황은 모든 사람을 “잠재적 환자, 아니 잠재적 고객”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저자는 숫자로 표현되는 모든 진단 방식의 한계를 어떻게 보완할 것인가를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보여준다. ‘숫자, 의학을 지배하다’는 약 없이 살 수 없는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가 한번 눈여겨 볼만한 책이다. 456쪽, 2만5000원.

장동석·‘뉴필로소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