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영화는 인생처럼 흐르고…. 영화의 메카 뉴욕은 오늘도 다양한 인종과 사연들이 섞이며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김병종, 40×52㎝, 종이에 먹과 채색, 2019)

뉴욕 필모그래피, 새벽 세시, 울어도 될까요

밀려온 밤 안개 속에 풀리는 불빛들. 신호등을 기다리며 두 사내가 이야기를 나눈다. 한 사내가 흘낏 이쪽을 본다.
순간 유리창이 박살 나고 사방으로 튀기는 피.
누군가는 미친 듯 소리를 지르는데
하얀 시트와 걸어놓은 와이셔츠와 시들어가는 노란 꽃과 천장에까지
사방으로 튀기는 핏방울
구사마 야요이가 함부로 뿌린 붉은 점들과도 같다.
뉴욕의 첫 밤은 늘 이렇게 어지러운 꿈으로 뒤숭숭하다.

뉴욕으로 오세요.
그 자유의 공기를 심호흡해보세요. 영감을 받을 거예요. 그러다 중독될지도 모르죠.
어쩌면 숭배하게 될지도. 여기는 뉴욕교의 이교도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니까요.
특히 영화광들의 천국이죠.
개인적 우울? 슬며시 사람들 사이에 섞여
무작정 그 흐름 따라 걸어보세요.
화성까지 닿을 듯한 그 빠른 걸음들 속에 섞여 있다 보면
하루 담배 열다섯 개비보다도 위험하다는
우울과 고독일랑 그야말로 연기처럼 사라져버리죠.
낙서 박물관같이 어지러운 거리의 그라피티 사이를 걷고
심야의 지저분한 브루클린행 기차를 타보세요. 그러면 정화가 되는 걸 느끼게 되죠.

하지만 그 뉴욕에 와서
낡은 호텔 구석 침대에 누워
이곳은 위험해, 나는 폐허 같은 광야에 내팽개쳐져 있어.
깜빡 잠이 들었는데
이번엔 우르르 쾅쾅 그리고 여인의 흐느낌
그 위로 덮치는 고함 소리와 함께 묵직한 무언가를 집어 던지는 소리.
어디선가는 흑인 여자의 소리인 듯 찢어진 재즈 가락이 들려온다.
너무 싼 호텔만을 찾은 내 잘못이야,
월도프 애스토리아쯤 묵어 보는 건데. 벽의 낡은 시계는 새벽 세 시.
벽 저편에서 여인의 흐느낌은 계속되는데, 조금만 더 울어도 될까요. 라고 묻는 것 같다.
한 번에 한 알씩만이라는 문구의
하얀 알약 두 알을 털어 넣고서야
비로소 혼곤한 잠속에 빠져든다.
꿈과 현실이 뒤죽박죽되면서 뉴욕에서의 한밤은 그야말로 영화처럼 흘러간다.

① 뉴욕

박물관·미술관·브로드웨이…
카메라 들이대면 영화속 배경
市자체가 움직이는 필모그래피

전쟁 겪지 않은 평온한 도시
로맨틱코미디 계열 작품많아
영화가 인생, 인생이 영화라면
뉴욕은 사랑할수밖에 없는 곳

이미지 크게보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은 명랑하다. 그리고 분주하다. 어느 혹성에서 쏟아져나온 신인류들인지 거리에는 넥타이를 단정히 매고 가방을 든 사람들로 가득하다.

여름이 가는가, 열어놓은 창으로는 바람이 서늘하다.

아침 식사 시간에 뒤숭숭한 어젯밤 얘기를 했더니 나를 초대했던 갤러리 남자는 토스트의 양면에 얄밉도록 천천히 버터를 바르며 말한다.

“갱 영화를 너무 많이 보셨군요 ‘갓파더’ ‘갱스오브뉴욕’ 그렇죠?”

“하지만 ‘뉴욕의 가을’이나 ‘러브인맨하튼’ ‘세렌디피티’ ‘뉴욕에 있는 모든 베르메르’ 같은 영화는 못 보신 거죠. 여기처럼 안전하고 흥분되는 곳도 없죠.”

남자의 말은 끝없이 이어졌다.

“한 마디로 여기는 영화 같은 도시입니다. 삶이 영화고 영화가 삶이라니까요. ‘뉴욕에 있는 모든 베르메르’만 하더라도 메츠(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베르메르 전시실에서 그냥 두 남녀가 만나는 것으로 시작된답니다. 따로 세트장이 필요 없어요. 카메라만 들이대면 어디든 영화가 된다니까요. 도시 자체가 필모죠. 새벽 세 시에 옆방의 여자가 흐느꼈다고요? 아쉽군요. 스탠리 큐브릭이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예술영화 한 편 만들어 냈을 텐데.”

“다시 말씀드리지만 뉴욕은 그 자체가 움직이는 필모그래피예요.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더구나 여기엔 투자자와 자본이 몰려있어요. 영화는 그 위에 핀 꽃이죠.”

허드슨 강을 따라 걷다가 벤치에 앉아 건너편 빌딩 위로 지는 낙조를 바라본다.

러시아 출신으로 뉴욕으로 건너와 뉴요커로 살다 뉴요커로 죽은 작가 아인 랜드(Ayn Rand)는 뉴욕에 반했던 여자였다. 세상의 어떤 아름다운 낙조와도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바꾸고 싶지 않다고 했을 정도였다니.

한 해에 10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찾아온다는 도시. 코파카바나나 칸쿤 같은 푸른 해변도 없는 이 빌딩 숲에 사람들이 그토록 몰려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특별히 뉴욕은 영화의 메카로 부상한 지 오래여서 많은 영화 애호가가 마치 답사 여행을 하듯 영화 속의 장면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영화 ‘대부3’의 알파치노 저택이 나오는 어퍼이스트사이드 맨해튼에서부터 ‘어거스트러쉬’의 워싱턴 스퀘어파크, 수많은 영화의 생생한 무대가 되었던 월스트리트, 그리고 센트럴파크의 ‘보 브리지’를 배경으로 한 중년 신사 리처드 기어와 미모의 여대생 위노나 라이더의 ‘뉴욕의 가을’까지.

올드팬의 향수를 자극하는 ‘러브어페어’의 무대가 되었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전망대도 영화 마니아들의 필수 탐방 코스다. 그리고 뉴욕의 크리스마스날 화려한 백화점 블루밍스데일에서 사랑이 얽혀지며 이루어지는 ‘세렌디피티’. 그 목마르고 달콤한 뉴욕풍 사랑 이야기는 실제로 1954년에 세워진 어퍼이스트사이드 맨해튼의 레스토랑 이름을 영화 이름으로 하고 있다. 생전 재클린 케네디와 메릴린 먼로가 자주 찾는 곳이기도 했대서 더 유명하다.

전쟁을 겪지 않은 도시여서 그럴까. 뉴욕의 영화는 극적인 파국과 황폐함보다는 로맨틱 코미디 계열이 많다. 그것도 잘 알려진 장소와 관련되면서 우연과 극적인 만남 같은 것이 자연스레 이어진다. 그 잘 알려진 장소들을 통해 데자뷔 효과를 내면서 마치 한 편의 소설이나 에세이처럼 그렇게 풀려나가는 것이다.

거의 한 거리 건너마다 있는 박물관과 미술관, 브로드웨이와 소호, 첼시, 웨스트사이드와 브롱크스, 할렘을 거느린 뉴욕, 그야말로 다양하고 거대한 세트장이라 할 만하다. 그 위에 시나리오 작가가 스토리의 얼개로 지붕만 덮으면 영화가 될 정도다.

영화가 인생이고 인생이 곧 영화라는 말이 맞는다면 뉴욕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도시다. 영화 같은 인생, 인생 같은 영화 그 자체이기 때문에.

화가·서울대 명예교수

이미지 크게보기

‘여인의 향기’ ‘원스어폰어타임인아메리카’… 친숙한 장소에 관객들 매료

뉴욕배경 영화들

부유층 영화에 자주 나오는 어퍼이스트사이드 맨해튼과 레축스힐, 할렘, 센트럴파크와 워싱턴하이츠, 첼시와 소호, 노호, 웨스트빌리지, 헬스키친, 킴스베이, 시빅센터, 허드슨하이츠, 거기에 월스트리트, 브로드웨이, 타임스스퀘어….

뉴스와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장소의 친숙함이 뉴욕을 배경으로 한 영화의 상당한 흥행요소이며 그 장소들을 자연스럽게 세트장으로 활용할 수 있음이 영화인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맨해튼을 둘러싸고 있는 브루클린, 브롱크스, 퀸스, 뉴저지며 스태턴 아일랜드 같은 다양한 성격의 지역성 역시 영화감독들을 잡아끄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런 요인으로 ‘여인의 향기’(사진)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폴링 인 러브’ 같은 로맨스 영화에서부터 ‘원스어폰어타임인아메리카’ ‘대부3’ ‘레옹’ ‘스파이더맨’ 같은 추리·액션물 등 셀 수 없이 많고 다양한 영화가 뉴욕을 배경으로 제작됐다. 그래서 많은 감독이 뉴욕을 헌팅 장소로 택하는데 영화작가들은 스탠리 큐브릭을 뉴욕영화의 상징인물로 꼽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