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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논설위원

‘우주 속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물질이 존재한다. 그 많은 물질마다 말을 하게 해서 무수한 말을 듣게 된다면…. 물질이 뱉는 말은 반드시 새로운 차원을 낳을 것이다. 나는 일체의 표현 행위를 멈추고 사물이 말하는 소리를 듣고자 하는 것이다.’ 잡지 ‘미술 수첩’ 1969년 7월호에 곽인식(1919∼1988) 화백이 ‘사물의 언어를 듣다’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의 요지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앞뜰의 소나무들 사이에 돌멩이를 차곡차곡 쌓아 15m 높이의 원통형 탑으로 만든 1986년 작품 ‘Endless(끝없는)’에도 그런 예술관이 담겼다.

돋보이는 독창성으로 시대를 앞서간 작품을 평생에 걸쳐 끊임없이 창출한 그는 세계 화단에서 ‘단색조 대가’ 등의 극찬을 받았다. 하지만 1937년 일본에 가서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했다가 1949년에 다시 가서 1982년 돌아오기까지 재일(在日) 한국인으로 활동한 사실로 인해 한국과 일본에선 주목받지 못한 ‘비운의 예술가’였다. 1950년대에는 패전국 일본의 불안한 현실을 반영해, 눈알을 강조하거나 손발을 과장하는 식의 초현실주의 경향 작품이었다. 1960년대 초반부터 사물과 자연의 근원적 형태인 점·선·원에 주목한 그는 1970년대 중반까진, 색을 바른 캔버스에 바둑알·전구·철사·놋쇠·유리 등 오브제를 붙여 물성(物性)을 두드러지게 했다. 아시아 전위예술의 시작으로 평가되는 유리 작품의 경우, 쇠구슬 등으로 유리를 박살 낸 뒤에 흩어진 조각을 모아서 균열을 살리며 다시 맞춰 ‘지울 수 없는 상처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모습’을 표현했다. 이 또한 물성을 드러내 본질을 찾는 작업이다.

그 후 작품에서 황동(黃銅) 판을 찢고 구멍 내어 철사로 다시 연결하는 식도, 질긴 한지(韓紙) 위에 송곳으로 찢은 흔적을 남겨 언제 완전히 찢어질지 모르는 긴장감을 표현한 것도 마찬가지다. 1970년대 후반에 강에서 가져온 돌을 쪼개 자연석과 붙이거나, 손자국을 남긴 점토를 만들고 나무 태운 재로 만든 먹을 표면에 칠하는 식으로 인간의 행위와 자연물을 합일시키는 시도를 한 배경도 다르지 않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곽 화백 탄생 100주년 기념 대규모 회고전이 지난 6월 13일 개막해, 오는 9월 15일까지 계속된다. 곽 화백 예술의 ‘무위(無爲)와 자유’를 느끼며 깊은 생각에 잠겨 들게 하는 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