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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권 정치부장

경제·안보 등 대형 악재 잇달아
위기 대비하지 않으면 큰 재앙
文 정부 대비책 불안감만 키워

日, 韓을 이웃 아닌 경쟁자 인식
도발을 묵인하면 동네북 신세
침묵 길면 최악 사태 가까이 와

7월 한 달 동안 일어난 사건들만 봐도 경제·외교·안보·국방·통상 분야에서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 강대국들에 휘둘린 구한말 상황에다 북의 도발이란 악재까지 겹쳤다.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 예고(1일)를 시작으로 6·25전쟁 이후 중국·러시아 군용기의 동해상 첫 연합 초계훈련과 독도 영공 침범(23일), 북한의 신형 탄도미사일(이스칸데르) 발사(25일)에 이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농업 분야 세계무역기구(WTO) 개발도상국 지위 포기 압박(26일)까지 나왔다. 북·중·러는 그렇다 치더라도 일본과 미국까지 한국 때리기에 나서면서 전통 우방·동맹국도 없는 형국이다.

위기를 예상하고 대비하면 전화위복의 기회가 된다. 세가 약하면 세를 불리고, 물고기를 잡으려면 그물부터 짜는 것이 순서다. 징비록의 핵심도 유비무환(有備無患)이다. 반대의 경우, 재앙은 필연이다. 복합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문재인 정부의 대응을 보면 대비는커녕 예상도 못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서희·이순신까지 언급하며 ‘친일 대 반일’ 구분에 열심인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행태는 위기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려 든다는 의구심마저 낳게 한다.

지난해 10월 대법원에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 나온 이후 정부는 민·관 대책 회의를 3회 개최했다. 그러나 “식사하면서 의견을 개진하는 미팅 수준에 불과했다”고 참석자가 비판할 정도로 보여주기식 회의였다. 정부는 이와 별도로 10여 차례 범부처 차관급 태스크포스(TF) 회의를 열어 한·일 양국 정부와 기업이 기금을 마련하는 방안을 마련해 지난 1월 청와대에 보고했지만, “발상 자체가 비상식적”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TF 해결 방안을 걷어찼던 청와대가 지난달 말 일본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양국 정부는 빼고 양국 기업이 기금 마련하는 방안을 부랴부랴 만들어 일본에 제시한 것은 블랙코미디다. 주무부처인 외교부와 강경화 장관의 역할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하기야 이낙연 국무총리가 미·중 무역 갈등에 적극 대처하라고 지시해 만든 ‘전략조정지원반’이 유명무실한 겸직 조직으로 구성되고, 조직을 이끌 반장마저 한 달 동안 공석이 되도록 내버려 둔 외교부를 누가 신뢰하겠는가.

오구라 가즈오(小倉和夫) 전 주한 일본대사는 “한·일 관계의 구조적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며 “‘일본은 선진국, 한국은 중진국 또는 떠오르는 나라’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지금은 동등한 파트너가 됐다”고 말했다. 일본 전문가인 한 전직 고위외교관은 “일본 사람들이 이전에는 한국을 ‘말썽은 부리지만 불쌍한 이웃’ 정도로 생각했지만, 지금은 경쟁 상대로 보고 있다”고 진단했다. 1980년대 제2 경제대국으로 승승장구하다 미국과 ‘플라자 합의’(1985년), ‘미·일 반도체 협정’(1986년)을 맺은 이후 반도체 사업이 몰락하고 잃어버린 20년을 경험한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를 예사롭게 봐선 안 된다는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 부품 국산화를 위한 규제 철폐와 예산 지원, 관련 기업과 기술 육성 등은 먼 훗날 성과가 나타날 일이다. 그때가 오더라도 자급자족 식의 ‘감정적 자강론’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사태’ 당시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과 백악관은 6가지 전략 시나리오를 준비했다. 각각의 시나리오는 소련의 핵미사일 발사에 따른 제3차 세계대전 발발 가능성부터 독일 서베를린이 봉쇄됐을 경우 생필품을 헬기로 어떻게 공급할 것인지까지 빈틈없이 치밀하게 짜였다. 케네디 대통령은 6개 시나리오 중 ‘봉쇄’ 전략을 선택해 대국민 방송을 통해 국민과 소련에 알렸다. 결과는 미국의 완승이었다.

위기 상황에서 침묵은 묵인이다. 부당한 보복과 도발에 침묵하면 다음엔 더 많은 것을 내놓으라고 하는 게 국가 간 역학관계다. WTO에서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를 비판한 김승호 산업통상자원부 신통상질서전략실장은 “한 대 맞았을 때 가만히 있으면 다른 나라도 와서 때린다. 동네북이 된다”며 “한 대 더 맞을망정 버티고 대들어야 한다”고 했다. 한 달째 일본에 원론적 대응만 반복하고, 러시아와 중국, 북한의 도발에 침묵하는 문 대통령을 보면서 미증유의 복합 위기 상황을 극복할 대책이 있긴 한 건가 하는 의구심이 늘고 있다. 대통령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재앙의 시간은 앞당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