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사회전염 현상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고 지금 우리 주변에도 널리 퍼져 있다. 그 뿌리를 뽑는다는 건 사실상 가능하지 않으며 부정적 사회전염을 긍정적 사회전염으로 바꾸는 일들을 공동체가 고민해야 한다. 자료사진

이미지 크게보기 명문고 학생들의 연쇄사고가 벌어진 실리콘밸리 팰로앨토의 통근열차 철로.

- 감정은 어떻게 전염되는가 / 리 대니얼 크라비츠 지음, 조영학 옮김 / 동아시아

美 명문학군 고교생 자살 이후
10명이 같은곳에서 목숨 끊자
과학적으로 ‘사회 전염’파헤쳐

마녀재판·총기 난사·여혐까지
최면 걸린 것처럼 집단속 동조
어디까지 자발적인지 판단안돼

유해한 감정 전염 해결 위해선
치유모임 등 ‘희망’ 번지게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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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심리학 전문 작가인 리 대니얼 크라비츠는 2009년 아내가 구글에 입사하면서 실리콘밸리의 팰로앨토로 이사했다. 이삿짐을 정리하다가 구급차의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듣게 된다. 인근 건(Gunn)고등학교의 학생 한 명이 대낮에 통근열차인 칼트레인 선로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3주 후에 졸업을 앞둔 여학생이 뛰어들어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이 발생했고, 6개월 사이에 무려 5명이나 동일한 선택을 했다. 몇 년 사이 10명으로 늘었다.

팰로앨토는 미국의 ‘스카이캐슬’이라고 할 수 있는 명문 학군이다. 구글을 비롯해 애플, 우버, 에어비앤비 등 세계 최고의 첨단 정보기술(IT)기업과 스타트업 종사자, 스탠퍼드대 교수·연구원들의 가족이 주민이다. 실리콘밸리의 고교들이 다 그렇지만, 건고등학교 학생들은 미국에서 가장 우수한 그룹에 속한다. 미국에서 가장 부유하며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고 최고의 ‘스펙’을 가진 학생들이 왜 연쇄적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이 책은 그 원인을 파헤치는 과학적 르포르타주다.

사실 연쇄 자살(Cluster Suicide)은 사례가 적지 않다. 특히 1984년 오스트리아의 젊은 사업가가 빈의 지하철로 뛰어든 후 거의 1년간 매주 5명의 비율로 동조 사건이 이어졌다. 언론 매체가 과도한 보도를 하면서 연쇄를 부추긴다는 분석이 나오자 빈시 당국은 관련 기사를 부각하지 못하게 언론에 ‘재갈’을 물렸는데, 이후 모방 비율이 80%나 떨어졌다. 이에 따라 주요 나라에서, 한국도 이 가이드라인을 시행하고 있다. 팰로앨토의 경우는 빈의 사례처럼 매체들이 가이드라인을 지켰지만 연쇄를 끊지 못했다. 학교에서도 예방 차원에서 현장 치료 같은 안전장치를 도입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저자가 ‘이상한 전염’(Strange Contagion)이라 명명한 이유인데, 책의 원제목이다.

관련된 논문과 연구자, 건고교의 교사 등을 밀착 취재하며 저자가 도달한 지점은 ‘사회전염’(Social Contagion)이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귀스타브 르봉이 명명한 사회전염은 사람들이 집단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무의식적으로 동조하고, 어떤 경우에는 최면에 걸린 개인이 최면술사에게 좌지우지되듯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채 행동하기도 하며, 마치 세균과 바이러스가 질병을 옮기는 것과 같이 그것이 전체로 전염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사회전염에 대해 연구하는 예일대 인간본성연구소 니컬러스 크리스타키스 소장은 “우리의 행위 중에서 어디까지가 자발적이고, 어디까지가 무의식적으로 타인을 모방했는지 판단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저자는 “주식 시장 분위기를 보면 탐욕에 전염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교내 총기 사건을 통해 폭력이 전파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며 “개인의 욕구와 행복은 물론이고 아량, 용기, 직업윤리 같은 본유 감각조차 감기처럼 타인에게 전염될 수 있다”고 말한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도 같은 생각이 번지는 사회전염을 ‘밈(meme)’이라 불렀다. 전염성이 강한 생각은 병균의 변이 메커니즘과 흡사해 “머릿속에 밈을 이식하며 수태를 통해 뇌에 기생하고 뇌를 생각의 번식 매개로 바꾸어 놓는다”는 것이다. 물론 사회전염의 양상은 공동체의 구조에 따라 다르고 복잡한 관계망에 영향을 받는다. 팰로앨토의 자살률은 전국 10년 평균의 5배까지 치솟았다. 실리콘밸리에서 이러한 연쇄 자살의 사회전염이 작동했다면 소위 무의식적 동화요인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학생들이 공동체로부터 전염됐을 혁신기반 경제공동체의 독특한 부자문화증후군, 역겨울 정도로 야심에 찬 직업윤리의 폐해, 과도한 성취 욕구 등을 꼽을 수 있다.

한국에서는 지속적으로 문제가 커지는 ‘여혐’과 소수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혐오현상은 사회전염으로 접근해 보면 다른 실마리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이 책도 건고교의 연쇄 사건을 쫓아가지만 큰 틀에서 보면 역사 속에서 그리고 현재 우리 주변의 사회전염을 다루고 있다. 예컨대 1691년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에서 무고한 여성들을 ‘마녀’로 몰아 고문하고 처형한 마녀재판의 광기, 2004년 인디애나주 작은 마을 피셔스의 주민들이 아무런 근거 없이 알카에다가 공격할지 모른다는 집단공포에 전염돼 미 중앙정보국(CIA)이 개입하기까지 한 사건 등이 있었다. 책은 미국 총기 난사 사건은 물론 거식증 등 섭식장애 등도 사회전염으로 설명한다.

저자가 만난 임상역학자 게리 슬럿킨은 “사회전염이라는 개념 자체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고 말한다. 사회전염은 긍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즉, 사회전염이 움직이는 방식과 그 영향력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면 생각이나 행동, 감정을 우리가 원하는 대로 바꾸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데 저자는 주목한다. 저자는 부정적인 사회전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사회전염을 활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종잡을 수 없는 사회전염의 폐해에 대해 공동체가 의연히 버팀목이 돼주고 공동체 집단지성의 성격을 성찰하고 바꾸어 사람들이 전염병에 노출되지 않도록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팰로앨토 주민들은 건고교에서 뮤지컬 공연을 열어 ‘희망’을 노래하고 학생들이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털어놓을 수 있는 장치들을 마련해 효과를 보았다. 섭식장애를 겪는 사람들은 함께 치유모임을 만들어 긍정적인 방법들을 전염시킨다.

결국 영향을 주고 소통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라는 자각이 필요하다. 그럴 때 긍정적 사회전염을 확산해 유해한 사회전염의 창궐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280쪽, 1만6000원.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