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러시아 전투기들의 23일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 침범과 러시아 정찰기의 독도 영공 침탈(侵奪)은 치밀하게 계획된 도발임이 확연해졌다. 무력 우위를 앞세워 대한민국 주권을 유린한 것은 물론 역내 평화를 파괴하는 공격적 행위로서, 거듭 강력히 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별개로, 문재인 정부가 ‘안보 동네북’ 신세로 전락한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그리고 독도 문제와 관련, 러시아는 노골적으로 한국 주권을 무시했고, 미국은 은근히 일본 편을 들었다. 하나같이 심각한 국가적 안보 과제들이어서, 정부가 비상한 각오로 대응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영공 침탈 3시간 뒤에 문 대통령 주재로 열린 당·청 행사에선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고 한다. 낚싯배가 전복되고 산불이 났을 때도 대통령이 긴급 지시를 하거나 국무회의에 앞서 묵념까지 했음에 비춰볼 때,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이날 오전 독도 주변 상공에서는 한국 공군과 중국·러시아·일본의 전투기와 폭격기 등 30여 대가 뒤엉켜 3시간여 동안 일촉즉발의 각축전을 벌였다. 유례를 찾기 어려운 위험한 상황으로서, 국가안보가 얼마나 위중(危重)한지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자칫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가 냉전이 아닌 열전(熱戰)의 무대가 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해야 할 상황이다. 사태 이후 관련국들의 반응을 보면 더욱 심각하다. 러시아 국방부는 “러시아 공군과 중국 인민해방군 공군이 아시아태평양 해역에서 첫 번째 연합 공중 초계비행을 수행했다”고 발표했다. 이런 일이 상시화할 것이란 예고다. 한국 영공 침해에 대해선 “국제법 규정을 철저히 지켰다”면서 부인했고, 항공대 사령관은 경고사격을 한 한국 공군에 대해 “공중 난동”이라며 적반하장 태도를 보였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은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한국과 러시아에 “우리 영토에서 이러한 행위를 한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재발 방지를 요구했다. 미국 국방부는 “중국과 러시아 항공기의 영공 침범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대응을 강력 지지한다”면서도 어느 나라 영공인지 적시하지 않아 일본을 간접 지지했다는 해석을 낳았다.

이런 상황에도 청와대와 여당의 태도는 안이하기 짝이 없다. 이날 청와대에서 열린 문 대통령과 민주당 원내지도부 오찬에서 이런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고, “제 부인이 대통령에게 사랑한다고 전해 달라고 한다” “김정숙 여사가 없어 아쉽다”는 등 한가한 얘기가 오갔다고 한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도 열리지 않았다. 여당은 당일엔 논평 한 줄도 없었다. 안보를 계속 맡겨도 될 것인지 불안하기 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