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 “그동안 입장 불명확
美·中 모두에 압박 빌미 제공”

한반도가 오는 6월 말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계기로 미·중 패권경쟁의 ‘테스트 베드(test bed·시험장)’로 떠오르며 미·중 양측으로부터 택일을 강요받는 상황에 처했다.

전문가들은 문재인 정부가 전략적 유연성은 유지하되, “중장기적 전략목표를 분명히 하고, 원칙적 입장을 명확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한국의 소극적인 ‘줄타기 외교’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됐으며 전략의 대전환 시점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낙연 국무총리가 미·중 전략경쟁 전담 조직 구성을 지시한 지 9일째인 7일에도 외교부는 “협의 중”이라는 답변만 반복하고 있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7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지금은 무역·기술경쟁 초기, 군사경쟁의 초·중기일 뿐”이라며 “미국은 이 같은 수단들로 안 되면 환율전쟁 카드를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신 센터장은 “우리 입장을 피력하지 않고 우물쭈물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라며 “당장 어려움이 있더라도 중장기적 이익을 기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상진 광운대 중국학과 교수도 “전략적 유연성이 필요하다”며 “우리 국익에 맞는 방향을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전문가들은 정부가 명확한 외교 전략을 취하지 않은 채 ‘어정쩡한 입장’을 취한 것이 미·중 모두에 압박을 받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지적했다. 중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보복이 대표적이며, 앞으로도 중국은 강온 양면 전략을 활용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성현 세종연구소 중국연구센터장은 논평에서 “중국과의 사드 갈등은, 한국에 보복하지 않으면 역내 다른 나라들도 향후 유사한 사건이 발생할 때 중국의 경고를 무시할 수 있기 때문에 보여준 시범 케이스”라면서 “‘원숭이를 겁주기 위해 닭을 죽인다’는 중국 특유의 고전적 전술”이라고 규정했다.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도 “한국이 취해온 ‘중간자’ 외교 전략은 중국에 ‘약한 고리’란 빌미를 만들어줬고 스스로 궁지로 몰리게 했다”며 “정부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동맹의 가치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미·중 전략경쟁 확전 상황에서 정부가 원칙은커녕 대응 전략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반도의 ‘테스트 베드’화가 예견된 지 오래인데도 정부가 이 문제를 너무 방관했다는 지적이다. 특히 G20 정상회의 전후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뿐 아니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 가능성까지 나오면서 미·중 양측의 압박은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대중 관세 부과 데드라인 선언이 G20 정상회의 전후에 이뤄질 것으로 예상되며, ‘환율전쟁’으로의 확전 가능성도 커진 상황이다. 신 교수는 “2013년부터 미·중 전략경쟁이 한반도에 엄청난 파도가 돼 돌아올 거라는 우려가 있었는데, 지금에서야 한다는 건 정부의 태만”이라고 지적했다. 신 센터장은 “정부의 정책 방향성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기업의 목소리도 듣지 않고 있다”고 강조했다.

정철순·김현아 기자 csjeong1101@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