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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직 논설위원

지난달 말 개봉해 1380여만 명의 관객을 끌어모으며 국내 개봉 외화 중 사상 최대 기록을 갈아치운 ‘어벤져스: 엔드게임’. 미국에서 제작된 이 영화는 정작 미국보다 이틀 앞서 한국에서 세계 처음으로 개봉했다. 한국 관객들의 반응이 워낙 빠르고 전문적인 리뷰도 많다 보니 “한국 관객의 반응을 보면 세계 흥행을 예측할 수 있다”는 인식이 글로벌 콘텐츠업계에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굴지의 글로벌 기업들이 한국을 새로운 상품과 아이디어를 검증받는 테스트 마켓으로 삼고 있는 것도 ‘깐깐한 한국 소비자’의 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도 미처 체크하지 못했던 제품의 미세한 결점을 한국 소비자들이 찾아내 블로그나 사용 후기에 올린 내용을 보고 혀를 내두르는 기업이 한둘이 아니다.

이토록 깐깐한 한국 소비자들이 ‘듣보잡’ 경제정책 하나로 인해 피멍이 들고 있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핵심인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이 그것이다. 2년간 무려 29%를 끌어올리니 이 정책을 맛본 소비자들의 사용 후기가 곡소리로 가득하다. 국민의 소득을 끌어올려 경제를 성장시키겠다고 야심 차게 내놨지만, 정작 올 1분기 국민의 가계살림(처분가능소득)은 10년 만에 감소세로 돌아섰다. 특히 최저임금 과속 탓에 노동시장에서 밀려난 빈곤층의 분노는 이미 위험수위에 도달했다. “지상을 천국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지옥을 만들 수 있다”는 과학철학자 칼 포퍼의 경고가 2019년 한국에서 현실화한 셈이다.

기업은 자신들이 내놓은 상품의 결함이 확인되거나 소비자들이 불편을 호소하면 즉각 리콜하거나 보완책 마련에 나선다. 그러잖으면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아 회사가 망하기 때문이다. 정부 정책도 마찬가지다. 최저임금위원회가 어제 새 위원장을 선출하고 내년도 최저임금 심의에 본격 착수했다. “최저임금 인상의 긍정 효과가 90%”라던 정부의 오기가 꺾이고 ‘속도조절론’이 나온다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인상 폭을 다소 낮춘다고 국민 원성이 가라앉을지는 미지수다. 국민이라는 소비자들이 ‘소주성’이라는 상품에 터뜨리는 불만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잘못이 확인된 정책을 고집하는 건 국민에 대한 테러나 마찬가지다. 위정자에겐 자존심의 문제인지 모르지만, 국민에겐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