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최초로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저력이 무엇인지를 분석하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봉테일(봉준호 + 디테일)’로 불릴 만큼 빈틈없는 연출, 장르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테크닉, 사회 문제를 비트는 시선 등등. 그러나 오늘의 그가 있기까지 지탱해준 힘은 만화에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봉 감독은 소문난 만화광입니다. 초·중등학교 때부터 만화책과 TV 만화를 좋아했다고 하고요. 그림 그리는 것도 즐겼다고 합니다. 그가 꼽은 추억의 만화는 길창덕의 ‘꺼벙이’, 소년중앙에 연재됐던 ‘아스트릭스’,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의 ‘미래소년 코난’ 등입니다. 저도 봉 감독과 비슷한 시기 소년 시절을 보낸 기자로서 ‘미래소년 코난’의 열혈 소년 코난과 비밀스러운 매력의 소녀 라나, 코난의 괴짜 친구 포비 등이 스치는데요. 봉 감독은 이런 만화를 보면서 만화가와 영화감독의 꿈을 키웠다고 합니다. 명문대 입학이 인생의 목표였던 시절, 만화책이나 보는 ‘한심한 놈’으로 취급받았을지 모르지만, 그로부터 40년 후 그는 전 세계 최고의 거장 반열에 오른 겁니다.

봉 감독의 만화 사랑은 그의 작품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설국열차’는 프랑스의 자크 로브와 뱅자맹 르그랑, 장마르크 로셰트의 그래픽 노블이 원작이죠. 봉 감독은 2004∼2005년 무렵 서울 홍대 부근 만화책방에서 ‘설국열차’를 우연히 읽고 영감을 받았다고 하고요. 연세대 재학 당시, 학보인 ‘연세춘추’에 시사만평을 연재할 정도로 그림 솜씨가 빼어난 그는 만화로 이뤄진 ‘콘티(콘티뉴이티)’를 전문 작가에게 맡기지 않고, 촬영현장에서 직접 그린다고 합니다.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다시 그림으로 그리니, 옮겨지는 과정에서의 의미 손실이 전혀 없겠죠. 그만큼 감독의 머릿속에 이미 장면 하나하나가 저장돼 있는 겁니다.

할리우드 거목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벨기에 만화가 에르제의 열혈팬입니다. 에르제는 ‘땡땡(한국어판 이름)’이라는 소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모험 시리즈로 유명한데요. 스필버그 감독은 에르제에게 영향받아 ‘틴틴: 유니콘호의 비밀’(2011)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하기야 전 세계를 점령한 ‘어벤져스’ 시리즈가 결국엔 마블 코믹스 원작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국내 제작되는 드라마 중 대부분이 웹툰에 기반하고 있으니 새삼 만화의 가치를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한때 주의력을 산만하게 하는 ‘금서’였던 만화는 이제 영화·드라마·게임 등 우리가 환호하는 문화 콘텐츠의 가장 강력한 원천이 됐습니다. 제2, 제3의 봉준호가 나오게 하려면 앞으로 밤새워가며 만화 보는 아이들을 꾸짖어서는 안 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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