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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미국인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대부분 그림 속 대도시의 주택이나 카페, 사무실 같은 배경과 그곳의 인물은 무척 공허합니다. 공간이고 인물이고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을 것 같은 익명성, 공백 같은 침묵 속에 있습니다. 그런 그림에 사람들이 매혹되는 것도 묘하지요. 국내에서 자크 라캉의 손꼽히는 연구자인 백상현 한국라깡칼리지 교수는 “이제까지의 의미를 상실한 순간의 세계 이미지” “정체성 상실의 순간 이미지”로 해석합니다. 라캉의 정신분석은 이러한 의미 상실의 순간을 ‘우울증’으로 부릅니다. 환자 스스로 세상의, 곧 상징체계의 언어로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지금 어떤지 설명하려 들지 않는 증상입니다. 정체성은 어차피 세상의 언어로 규정된 허상이니 그 상실의 공백을 오히려 존재의 전환에 사용하도록 권유하는 라캉이지만, 그도 “우울증에 떨어져 버리면 안 된다”고 거리를 둡니다. 모든 욕망의 강렬도가 ‘0’인 상태인 우울증은 마음뿐 아니라 몸의 에너지까지 사라지게 합니다. 라캉의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우울증 분석이 도움이 되겠지만, 당사자들은 당장 절박할 겁니다.

우울증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흔히 ‘마음의 감기’ 정도로, 툭툭 털어버릴 수 있는 가벼운 질환으로 여깁니다. 요새 유튜브에도 우울증을 검색하면 적잖은 동영상이 나오는데, 그중에 의학, 종교, 명상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조차 제대로 증상을 이해 못 하고 조언을 하는 경우를 봅니다. “마음을 바꿔 봐”라든가 “세상이 원래 힘든 거지, 힘내”라는 식의 섣부른 조언은 안 하니만 못합니다.

위즈덤하우스가 이번 주 출간한 ‘아무것도 할 수 있는’은 우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원래 우울증을 겪고 있거나 겪은 사람들의 글을 모아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2016년과 이듬해에 한 권씩, 두 권으로 독립 출판됐던 책입니다. 당시 미디어의 주목을 받진 못했어도 동네 책방을 통해 꾸준히 팔렸습니다. 이런 식의 책을 기다렸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셈이지요. 이번에 위즈덤하우스에서 두 권을 묶어 다시 내게 됐고, 수익금 중 일부는 자살 예방을 위한 사회복지법인 한국생명의전화에 기부된다고 합니다.

책을 기획하고 엮은 김현경 작가는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겪어 치료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김 작가도 책에서 언급하지만, 우울증을 혼자만의 의지로 이겨내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이런 나를 그 자체로 이해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우울증 증상을 가진 이들이 가장 많이 한답니다. 솔직히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통계로도 우리 사회에 우울증이 있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우리 중 상당수도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속 인물처럼 의미를 잃고 우울감을 애써 외면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요.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