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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숙 논설위원

1990년대 공산권 붕괴 때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부터 분리 독립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발칸반도의 심장과 같은 곳이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오스트리아 황태자 살해사건이 이 나라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발생했다. 또, 유고 연방에서 독립한 후엔 이슬람을 믿는 보스니아인, 세르비아 정교를 믿는 세르비아인, 로마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인들이 분리 독립을 추구하며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바람에 10여만 명이 희생됐다. 미국 개입으로 1995년 데이턴 협정이 이뤄지며 평화를 찾았지만 지금도 보스니아의 종교·민족갈등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다.

이 나라의 메주고리예라는 작은 마을에 매년 수백만 명의 순례객이 모여든다. 유고 시절이던 1981년 6월 메주고리예의 크리니카 산에서 어린이 6명이 성모 마리아를 목격했다고 증언한 후 계속 성모가 발현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때문이다. 교황청이 공인한 성모 발현지로는 프랑스 루르드와 포르투갈 파티마가 유명하다. 반면 메주고리예는 성모 발현 이후 40년 가까이 됐지만, 여전히 ‘미공인’이다. 그러나 순례객이 급증하자 교황청은 지난 12일 순례를 공식 허용키로 했다. 다만, 알렉산드로 지소티 교황청 대변인은 “메주고리예 성모 발현의 사실 여부를 조사 중”이라며 “이번 결정을 성모 발현의 진실성에 대한 인정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최근 발칸 지역 여행 중 메주고리예를 방문했을 때 한국은 물론 인근 이탈리아와 그리스, 미국 등지에서 온 수백 명의 순례객을 만났다. 황토에 뾰족한 돌무더기로 덮인 산이어서 오르기가 쉽지 않았지만 모두 진지한 표정으로 크리니카 산을 올랐다. 성모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이 산의 중턱은 성모 발현 언덕으로 불린다. 성모상도 세워져 있는데 한국 가톨릭 교회가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20여 년 전 보스니아 전쟁 때 크로아티아는 메주고리예를 차지하기 위해 혈투를 벌였다. 무슬림 여성들을 윤간했고 남성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그런데 요즘엔 두 나라가 평화를 되찾았다. 크로아티아의 축구선수들은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때 메주고리예 성모 발현 언덕에서 출정식을 했다고 한다. 이 덕분인지 몰라도 크로아티아는 준우승을 했다. 메주고리예의 성모(聖母)는 발칸의 상흔을 치유하는 화해의 상징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