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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빈의 사상 / 나카노 고지 지음, 김소영 옮김 / 바다출판사

책의 제목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박물관에서나 만날 곰팡내 나는 이야기라고 지레짐작하지는 않으셨는지? 한자로 맑을 청(淸), 가난할 빈(貧)을 쓰는 청빈은 우리 시대에는 사어(死語)처럼 돼 있다. 일본의 작가 겸 평론가 나카노 고지는 잊어져 가는 이 말을 화두로 삼아 책을 썼다. 일본인이 세계 각국 사람들로부터 ‘경제 동물’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거북해서였다. 그는 돈벌이에 목매 부귀영달을 추구하는 풍조만 일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세계를 소중히 여긴 문화전통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현세의 삶은 가능한 한 간소하게 누리고 마음은 풍아(風雅)의 세계에서 노니는 사상이 일본 정신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책의 1부 앞부분은 혼아미 가문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혼아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때 도검 감정 분야에서 이름을 떨친 교토의 상인 집안이다. 이들 집안 사람은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으나 그 욕망을 억누르고 소박한 삶을 택했다. 칠기공예의 대가였던 혼아미 고에쓰는 평생 작은 집에 다다미 두세 장짜리 다실을 만들고 홀로 차를 즐기는 모습으로 일관했다. 그의 어머니 묘슈는 자손들이 옷이며 용돈을 줄 때마다 모두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주었다. 세상 사람이 모두 가난한데 혼자만 많이 소유하는 것은 죄악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저자는 문학가답게 일본 문학사·예술사에서 손꼽히는 거장들의 사례를 통해 청빈의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탁발시승으로 걸식하며 탁월한 시작품을 남긴 다이구 료칸을 비롯해 하이쿠의 성인이라 불리는 마쓰오 바쇼, 와카의 명인 사이교, 산문가 가모노 조메이 등이 등장한다. 일본 문인화의 쌍벽인 이케노 다이가, 요사부손 등도 만날 수 있다. 이들은 자신의 예술세계를 이루기 위한 길을 걸으며 세속의 때에 물들지 않는 이속(離俗)의 경지를 보여줬다. 청빈은 그것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책의 2부는 인도철학, 성 프란치스코, 에리히 프롬 등의 이론을 통해 청빈의 사상을 구체화한다. 일본의 정신 전통이 서양의 그것과 통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인데, 다른 나라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일본 작가의 마음이 읽힌다. 저자 나카노 고지는 “젊은 시절 일본 국수주의를 혐오했는데, 나이 들어서 일본과 일본인을 선전하게 됐으니 얄궂다”고 써서 자신의 민망함을 드러냈다. 아이러니한 것은, 청빈을 주제로 삼은 이 책이 1992년 일본에서 처음 나왔을 때 베스트 셀러가 되는 바람에 저자가 큰돈을 벌었다는 사실이다.

이 책은 27년 전에 한국에도 소개됐으나 얼마 있다가 절판되는 바람에 볼 수가 없었다. 이번에 일본 고전 문학 전공자가 새로 번역해 펴냈다. 일본 전통 시가의 맛깔을 제대로 누릴 수 있도록 꼼꼼히 옮겼다는데, 실제로 읽어보니 고개가 끄덕거려졌다.

이 책은 우리에게도 조선 선비 등의 청빈 전통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것이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고루하게 여겨질 수 있겠으나, 내 삶의 방향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성찰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을 듯싶다. 소박하고 간소한 삶, 즉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겐 정신적 만족감을 크게 줄 만한 책이다. 302쪽, 1만5000원.

장재선 선임기자 jeije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