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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향아설위(向我設位)’를 처음 접하고 둔중한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동학의 2세 교조 해월 최시형은 1897년 벽(병풍) 쪽에 위패(位牌)와 음식을 차리고 절을 올리는 기존 유교식 제사를 뒤집어버립니다. 절하는 사람 쪽으로 위패와 밥그릇을 놓는 것이지요. 조상의 영혼이 강림해 후손의 절을 받는 게 아니고 후손들 속에 살아 숨쉬는 영혼, 곧 나를 향해 절하라는 존재론적 전도(顚倒)입니다. 거기에 담긴 종교·수행적 깊이는 접어두더라도, 유교가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당대에는 그야말로 혁명이었을 겁니다. 동학은 반상(班常)은 물론 남녀, 빈부, 온갖 위-아래를 뒤집어 평등한 관계와 질서를 세우고자 한, 여전히 온전하게 구현되지 못한 미래적 사상이요 실천입니다.

11일은 1894년 동학농민군이 황토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날을 기리고자 올초 정부가 확정한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을 처음 치르는 날입니다. 125년 만에 동학이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은 셈입니다. 사학자인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코리아텍) 대우교수가 첫 국가기념일에 맞춰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들녘)를 펴냈습니다. 독일 튀빙겐대·보훔대·베를린자유대 한국학과장, 서강대 사학과 교수를 지낸 백 교수는 동서양을 아우르는, 기존 역사해석을 딛고 넘어가거나 계보학적으로 밑동을 파고드는 20여 권의 역사 저술을 펴냈는데, 골수 독자층이 적지 않습니다. 책은 2014년 하자센터에서 가졌던 네 차례 강의를 바탕으로 새로이 엮은 것입니다.

책을 관통하는 큰 줄기는 동학의 ‘평등’에 관한 백 교수의 관점입니다. 사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사회든 현대든 사회적 관계의 불평등이 인간 사회의 질곡을 만들었습니다. 동학을 열고 체계를 잡은 최제우와 최시형은 평등의 가치를 통해 정의로운 공동체를 지향했습니다. 백 교수는 하지만 그들의 평등이 서구 계몽주의의 산물인 정치·경제적 평등, 곧 산술적 평등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봅니다. 단지 동등한 자격과 권리를 강조한 게 아니라,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존귀함, 더 나아가 동물, 무생물까지 우주만물의 존귀함을 일깨웠다는 것이지요. 동학의 철저한 평등관념은 서학에서 흘러들어온 것이 아니었고, 인간 중심까지도 청산하는 ‘관계의 질적 전환’이었다고 백 교수는 해석합니다.

서구 근대의 평등은 식민지 백성에게는 적용되지 않았고, 흑인 등 인종에 대한 차별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양대 세계대전을 치렀고, 자연에 대한 약탈적 착취는 지구 생태계의 위기로 치달았지요. 동학은 관계의 질적 전환을 통한 자주적 근대화, 어찌 보면 산업화 없는 근대화를 지향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습니다.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근대를 선사할 수도 있었던 동학의 하늘은 ‘한없이 너르고 깊은’ 것이었습니다.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