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이제교 국제부장

카자흐스탄 세미팔라틴스크는 황량하고 쓸쓸한 죽음의 땅이다. 스텝 지대임에도 파릇한 풀은 없고 온통 회갈색 웜우드(약쑥)만 자란다. 구소련은 세미팔라틴스크 테스트 지역에서 1949∼1989년 사이에 456차례의 핵실험을 했다. 가끔 핵과학자들이 연구목적으로 검은 관광, 이른바 다크-투어 방문에 나설 뿐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이다. 유전자 변형 사례가 보고된 방사능 오염지대다.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중앙아시아 3개국 순방에 나선 문재인 대통령은 17일 한·투르크 정상회담을 하고 대규모 경제협력을 약속했다.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은 “문 대통령은 21∼23일 카자흐에서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초대 대통령과 면담하고 비핵화 경험을 공유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지금도 지켜지는지 몰라도 기자 세계에는 ‘순방길에 오른 대통령을 과도하게 비판하지 말라’는 불문율이 있다. 국가 대표로 외교를 하고 있는 만큼 비판을 잠시 자제하라는 취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대북제재 완화 요청을 외면하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오지랖’ 발언으로 면박을 주고,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오사카 G20 회의에서 한국과는 정상회담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는 시점에 왜 중앙아 3개국 순방에 나서는지를 묻는 것은 그래서 뒤로 미룰 필요가 있다.

하지만 카자흐에서 문 대통령이 나자르바예프 전 대통령과 만나 비핵화 경험을 공유하면서 행여나 한반도 비핵화의 모델로 삼기 이전에 정리하고 지나갈 부분이 있다. 먼저 카자흐는 구소련의 일방적 핵실험 장소였지, 국익을 걸고 핵 개발을 강행한 적은 없었다. 소련 해체과정에서 1322파운드의 우라늄과 1410기의 핵탄두를 물려받았을 뿐이다. 핵무기를 보검으로 여기는 북한과는 다르다. 카자흐가 중앙아 5개국 핵무기제로지대(CANWFZ) 협약 체결을 주도한 것도 1996년에 모든 핵무기 포기가 이뤄지고 10년 뒤인 2006년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은 미국의 주도면밀한 작전 속에서 비핵화가 진행됐다는 사실이다. 빌 클린턴 행정부는 경제난으로 관리능력은 물론 의지도 약했던 카자흐에 핵무기 1기당 100만 달러에 사는 ‘사파이어 작전’을 전개해 핵물질을 1300개 강철 깡통에 담아 본토로 수송했다. 미국의 외교정책은 러시아와 중국에 둘러싸인 카자흐가 핵보유국이 되고, 잠재적으로 미국을 위협하는 상황을 방관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남북한이 어떤 행보로 나오든 미국은 김정은 정권의 핵 보유를 좌시하지 않는다. 문 대통령이 미국의 손을 절대로 놓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그리고 짧지 않은 사족 하나, 미국은 동맹국 한국이 일대일로 정책에 엮이는 상황도 반기지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11일 백악관에서 향후 행보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중국, 북한, 베네수엘라, 그리고 세상의 모든 문제를 처리할 것”이라고 답했다. 그의 머릿속은 중국은 패권경쟁 대상, 전체주의 국가, 손볼 대상이라는 인식으로 가득하다. 중앙아 3개국은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 정중앙에 위치한 핵심협력국가다. 대국(大國)이 아닌 한국에는 심사숙고가 담긴 행보가 요구된다. 외교의 지혜는 냉정한 현실의 올바른 인식에서 나온다.

jk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