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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방언 재일 한국인 음악가

나는 결코 미식가는 아니지만
누구와 즐겁게 먹은 일은 기억

카자흐스탄서 고려인들 만나
아리랑 노래 부르며 감각 공유

한국 음식 함께 먹으며 뿌리 공감
가장 맛있는 식사였음은 당연

공존 시리즈 중에서 이번에는 음식과의 공존편이다. 오늘의 유기농 바람(organic boom) 이전에 퓨전식이라는 게 있었다. 그때는 오늘은 뭘 먹을까 하면 대개 “퓨전”이라고 했다. 사실은 내 음악도 퓨전, 크로스오버, 뉴에이지 등 이름이 하도 많아 나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퓨전이란 ‘섞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는데, 적절한 해석인 것 같다. 그러면 내 음악도 퓨전일까.

무대에서 나를 소개할 때 종종 퓨전이란 말 외에 “뉴에이지 피아니스트 양방언입니다”라고 해서 “응? 나?” 하고 놀란 적도 더러 있다. 하지만 뉴에이지에서부터 전통음악, 다큐멘터리 그리고 애니메이션과 게임 음악까지 작곡하니 내 음악은 폭이 꽤 넓은 편이다. 그래서 내 음악은 퓨전 음악 또는 크로스오버라고 불린다. 새삼 말하면 장르의 공존이 돼 가는 것이다.

업무상 세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지만 일이 있어 갔을 때 좋아하는 지역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음식도 마찬가지다. 30대 때 청룽(成龍)의 영화음악이나 저명한 록밴드를 오랜 시간 프로듀스하고 있었던 때도 있다. 당시는 모국인 한국을 방문하기 전이었고, 홍콩의 중국 반환 이후로 격동의 시기였다. 1개월 단위로 머물거나 그렇게 동남아시아 주변을 콘서트 투어로 돌아다녔지만, 체류 기간이 길어도 놀라울 정도로 나는 태연했다. 그래도 오히려 즐겁고 시간이 흐를수록 주변 환경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 시절 홍콩에서는 ‘건전한’ 뮤지션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기에, 시간 사이클은 일반인과 정반대였다. 오후 5시부터 리허설이 시작돼 밤 12시에 끝나면, 그때부터 모두 함께 또는 혼자서 노점을 찾아가 길거리 음식을 먹곤 했다.

내몽골에도 몇 번 들른 적이 있다. 그곳 국영방송의 다큐멘터리 음악을 맡고 있을 때는 제작진과 함께 오랫동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내몽골은 동서로 길고 넓어서 민족이 다양했다. 그때 음식에 관해 인상적이었던 것이 위구르부터 중국 서북부의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는 회족과 그들의 음식, 즉 ‘칭전(淸眞·할랄)요리’였다. 회족은 중화계 이슬람 최대의 민족인데, 그 상징이 녹색이란 게 특징이다. 그래 그런지 길거리에서 눈에 띄는 녹색 간판 식당은 거의 회족 음식점이었다. 한국에선 ‘양꼬치’라고 하는 양러우촨(羊肉串)을 먹었을 때 “이거, 맛있네” 하고 감동했었다. 이제 그 양꼬치는 한국이나 일본에서도 수시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그런데 지금도 머릿속에 강하게 남아 있는 게 있다. 내몽골 동북지방의 다큐멘터리 음악 제작 때문에 찾았던 그 지역에는 조선족이 많았다는 것이다. 촬영팀이 나를 배려해서 냉면 맛이 최고라는 조선족 식당으로 안내했다. 평양식 냉면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테이블에 나온 것은 정반대였다. 듣도 보도 못한 매운 수프에 맵게 양념한 야채를 잔뜩 올린 것이었다. 음식 맛은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정작 나를 감동시킨 건 식당 아주머니였다. 식당에서 유일하게 한국어를 할 줄 아는 그 아주머니가 더듬거리는 한국말로 다정하게 말을 걸어왔다. 자신은 이곳에 산 지 몇 대(代)째인데 어떻게 살아왔다면서, 내게 어디에 사는 조선족인지부터 묻는 것이었다…. 그 집에서 맛있는 냉면은 못 먹었지만, 마음이 따뜻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지난해 9월의 일이다. KBS 다큐멘터리 촬영 때문에 극동러시아, 연해주부터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바이칼 호수를 거쳐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까지 여행했다. 프로그램은 ‘아리랑 로드 디아스포라(고국을 떠난 사람)’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과 전쟁 중, 이후의 여러 사정 때문에 전 세계로 흩어진 고려인들 이야기다.

내가 참여한 것은 러시아 편이다. 연해주에 있던 17만여 고려인이 스탈린의 명령으로 1937년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생사를 오가는 가혹한 여건 속에서도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며 늘 곁에 있었던 것은 ‘아리랑’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었으니 그들의 ‘모태 음식’(솔 푸드)이다. 그들은 대대로 당시에는 물론 지금도 ‘아리랑’을 부르며 마음의 고향으로 삼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강제 이주하게 된 사연과 거의 같은 경로를 되짚어가던 중 최종 도착지인 카자흐스탄에서는 자신들의 새로운 ‘아리랑’을 작곡하고 연주하는 대단한 뮤지션과 함께 연주까지 할 수 있었다. 여행의 종착지는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의 황량한 벌판에 흩어져 잠든 수많은 고려인의 묘지였다. 추모하고 진혼하는 마음을 담아 피아노를 연주하고 돌아왔다.

그곳 고려인들과는 거의 한국어로 의사소통이 됐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한국어도 유창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래도 그들의 깊은 가슴속 얘기를 함께 나누는 공감각과 ‘아리랑’이라는 공유할 수 있는 음악이 있었다. 그리고 새삼 큰 공통분모로 한국 음식을 함께 먹었으니 그 밖에 더 필요한 게 뭐 있을까. 그 음식이 가장 맛있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그들은 분명히 디아스포라이고, 어떤 의미에선 나도 일본에서 태어난 디아스포라 아닌가. 그런 서로가 음악을 통해, 유창하지 않은 한국어를 통해, 그리고 한국 음식을 즐기면서 일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우리들’의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했던 순간이다. 당연히 그곳 한국 음식은 한국에서의 음식과는 달랐지만, 나로선 최고의 맛 그리고 최고의 식사 시간이었다.

덧붙여, 전 세계 여기저기를 공연하러 다니면서 각양각색의 음식을 먹어도 위장이 망가지지 않고 현지에 순응할 수 있는, 건강한 소화기를 물려주신 부모님께 새삼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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