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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욱 스탠퍼드大 교수 아시아태평양연구소장

美 아시아학회도 재조명 노력
서구 ‘1968 운동’만큼 보편성
왜곡 말고 視野 넓히는 계기로

지난해 봄 미국 아시아학회의 공식 학술지인 ‘아시아학 저널’(Journal of Asian Studies) 편집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1919년에 아시아 지역에서 일어났던 반식민주의·반제국주의 운동 특집호를 100주년이 되는 2019년에 맞춰 발간하려고 한다면서, 3·1운동에 관한 논문을 써 달라는 요청이었다. ‘1968 정신’을 기리며 지난해 50주년 특집호를 냈던 미국 역사학회지(American Historical Review)와 비슷한 콘셉트로 특집호를 내려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1968 정신을 보편화하려는 학계의 노력은 많았지만, 1919 정신을 보편화하려는 노력은 거의 없었기에 흔쾌히 원고 요청을 수락했다. 특집호는 5월 발간된다.

1968년은 서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유럽과 미국 등지에 불길처럼 번졌던 젊은 세대의 운동은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을 넘어 제1세계와 제3세계 사이에 여전히 존재하는 억압과 종속관계에 대해 눈을 뜨게 했고, 베트남전 반대 투쟁은 여러 나라의 청년들을 하나로 묶었다. 물론 지역에 따라 그 저항의 대상이나 성격은 조금씩 달랐다. 미국에선 반전 투쟁과 함께 흑인 민권운동이, 프랑스에선 권위주의적 드골 체제에 대한 저항, 독일에선 홀로코스트 등 과거사 범죄에 대한 기성세대의 침묵에 도전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전 총리나 미국의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등을 대표적인 68세대 정치인으로 꼽을 수 있다.

이처럼 1968년 미국과 유럽에서 벌어진 청년 사회운동은 개별국가의 저항이 갖는 특수성을 넘어서 보편성을 갖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소위 1968 정신을 계승하고 현재화하려는 노력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반면 1919년에 식민지 조선을 비롯해 중국, 베트남, 필리핀, 인도 등 아시아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난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운동을 1919 정신으로 체계화하려는 노력은 찾기 어렵다. 물론 각국이 처한 사정에 따라 그 저항의 형태나 성격은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었지만, 1968년의 사회운동처럼 1919년 아시아지역에서 일어난 저항운동의 보편적인 성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3·1운동은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러시아 혁명의 투쟁 정신을 반식민지 운동으로 내재화했을 뿐 아니라, 이후 중국에서 일어난 5·4운동을 비롯해 아시아 지역의 저항운동에 불을 지폈다. 또 항일을 넘어서서 동양 평화와 인류애로 나아가는 운동임을 천명하기도 했다. 실제로 독립선언서는 조선의 독립이 “일본으로 하여금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동양을 붙들어 지탱하는 자의 중대한 책임을 온전히 이루고, 지나인(支那人·중국인)으로 하여금 꿈에도 잊지 못할 괴로운 일본 침략의 공포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또 동양 평화로써 그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의 필요한 단계가 되게 하는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3·1운동이 동아시아 근대사에 이런 중요한 의미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국내에서는 항일이라는 좁은 민족주의적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진영 논리에 따른 소모적인 논쟁만 가열되고 있다. 마치 북한의 ‘3·1 봉기론’을 떠올리게 하는 ‘3·1 혁명론’을 주창하거나, 3·1운동에서 ‘촛불 혁명’의 기원을 찾는다며 그 유산을 통째로 독점하려는 행위는 오히려 그 정신을 왜곡하는 것이다.

3·1운동으로 시작된 1919년의 시대정신은 대립과 분열이 아닌 화합과 통합, 불의와 억압에 대한 도전과 저항, 독점이 아닌 공유, 폭력이 아닌 비폭력에 기반한 성숙된 시민 의식이며, 정치적·이념적 양극화로 치닫고 있는 오늘날 한국사회에 던지는 의미가 결코 작지 않다. 3·1운동 이후 항일 세력이 급진적 사회주의와 개량적 민족주의로 양분돼 그 정신을 살리지 못한 채 독립은커녕 민족 분단의 씨앗을 제공했던 뼈아픈 역사적 경험을 되풀이해서도 안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이 21세기 아시아의 리더가 되는 데에도 1919 정신이 중요한 바탕이 될 수 있다. 동아시아 근대사에서 한국이 주도했던 사건이나 경험이 많지 않지만, 적어도 3·1운동만큼은 1919년에 이 지역에서 일어난 저항 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이 분명하다. 아시아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구현됐던 제국주의적 억압에의 항거, 비폭력, 동양 평화, 인류애의 고양 등은 1968 정신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1919 정신이라고 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과거를 미화해서는 안 되지만, 역사적 역할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우를 범해서도 안 된다. 100년 전 오늘 조선이 3·1운동의 외침으로 아시아 저항운동의 기폭제가 됐다면, 이제는 과거사 문제로 점철된 동아시아 지역의 새로운 평화와 공존의 질서를 만드는 데 한국이 앞장서는 것이 1919 정신을 제대로 실천하는 길이다.

이미지 크게보기 드론 100대가 지난 25일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 이벤트를 하고 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