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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레나

영화 ‘말레나’(2000·사진)의 배경은 무솔리니가 나치독일과 동맹을 맺고 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기로 선언한 1940년 시실리의 작은 마을이다. 세상이 어떻게 미쳐 돌아가든 마을 사람들은 그저 일상을 살아가는 데 여념이 없다. 그 가운데 12세의 레나토(주세페 술파로)는 커져 가는 성욕에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레나토는 친구들의 꼬임을 못 이기고 수업을 빼먹은 채 강둑에 앉아 한 여인이 지나가길 기다린다. 멀리서 진한 갈색의 긴 머리에 하얀 원피스를 입은 한 늘씬한 여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약속이나 한 듯 소년들의 음담패설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오늘 밤 여자의 집을 찾아가 그의 다리 사이에 즐거움을 안겨 줄 것이라는 둥, 여자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을 것이라는 둥, 패거리의 구역질 나는 농담이 지겨워질 때 즈음 말레나(모니카 벨루치)가 마침내 레나토의 시야에 안착한다. 레나토는 터져 나오는 탄성을 참지 못한다. 아름다운 피부와 색을 알 수 없는 깊은 눈동자,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원피스도 차마 감추지 못하는 여자의 놀라운 몸매. 레나토는 무심히 자신을 지나쳐 걸어가는 말레나의 엉덩이를 보는 순간 온몸이 발기하는 것을 느낀다. 레나토는 사실 말레나가 자신뿐만이 아닌 동네 사람 모두의 관심사라는 것을 깨닫는다. 동네 남자들은 그가 지나갈 때마다 음탕한 미소를 감추지 못하며 그들의 아내들은 말레나를 히틀러보다도 더 미워한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에도 말레나는 전쟁에 나간 남편을 대신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마을을 동분서주한다. 그런 말레나와 마주친 순간부터 레나토는 그의 노예가 된다. 낮에는 강둑에서 구직하러 떠나는 말레나를 기다렸다가 밤이 되면 말레나의 집 지붕에 올라가 그의 알몸을 엿보며 자위를 하는 것이 레나토의 하루다.

한편, 말레나를 향한 마을 여자들의 질투는 광기에 이른다. 여자들은 말레나가 동네에 있는 모든 유부남을 유혹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그가 일자리를 얻지 못하게 만든다. 말레나의 유일한 피붙이인 아버지에게도 딸이 창녀라는 투서가 보내지고 이로 인해 부녀는 절연(絶緣)하게 된다. 그가 가진 아름다움에 대한 저주로 말레나는 일을 하지도, 먹을 것을 구할 수도 없는 채 홀로 남겨진다. 허기와 가난에 지친 그는 결국 빵과 비누를 위해 몸을 내놓는다. 밤마다 식료품 꾸러미를 들고 찾아오는 짐승 같은 마을 남자들을 말레나는 떨쳐내지 못한다. 총기를 잃은 말레나의 눈과 그 위에서 추악한 욕망을 채우는 정체 모를 남자의 뒷모습을 지붕 위에서 지켜보던 레나토는 숨죽여 흐느낀다. 레나토가 말레나를 향한 사랑에 서서히 지쳐갈 무렵 말레나는 주둔하고 있던 독일군들과도 공공연히 마을을 누비며 뒤집힌 세상과 자신의 운명에 순응한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웃음을 보내는 마을 여자들을 말레나는 증오로 가득 찬 시선으로 마주한다.

다행히 독재의 전염병은 이탈리아를 집어삼키지 못했다. 연합군이 승전을 알리면서 마을 사람들은 기쁨의 환호성을 지른다. 그럼에도 마을 여자들에게 더 중요한 일은 말레나를 끌어내서 능멸하는 것이다. 여자들은 말레나를 광장 한복판으로 끌고 와 옷을 찢고, 뭇매를 때리고는 절규하는 여자의 머리털을 자른다. 수많은 남자의 시선이 머물렀던 말레나의 가슴과 얼굴이 피투성이가 됐지만 그 누구도 여자들을 말리지 않는다. 만신창이가 된 말레나는 곧 짐을 싸서 마을을 떠나는 기차로 향한다.

이 영화의 연출자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은 전작인 ‘시네마천국’에서도, 이 작품에서도 성장드라마의 형식을 빌려 소년의 눈으로 세상의 광기를 관찰한다. 토르나토레가 비추는 소년들의 관심사는 대부분 친구와 여자에게 놓인 듯하지만 그들의 눈은 늘 그 너머의 것을 응시한다. 이들이 본능적으로 감지하는 것은 ‘폭력’이다. 전쟁의 폭력, 가정 폭력, 공동체 안에서 자행되는 사회적 폭력은 토르나토레가 소년의 시선을 통해 전달하는 세속의 스펙터클이다. 영화의 전반에서 보이는 시실리의 풍광은 그 안팎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대조를 이루며 서글픈 아이러니를 전시한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