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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돈오(頓悟豚烏)는 문득 깨침에 이른 돼지와 까마귀입니다. 돈오(頓悟)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단계를 나타내는 불교 용어로, 문득, 홀연이라는 뜻의 돈(頓)은 지극히 짧은 찰라의 시간을 말합니다. 따라서 돈오란 깨달음을 위한 점진적인 단계를 거치지 않고 단박에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깨달음이란 바로 자신의 마음이 곧 부처임에 대한 자각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을 이미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새로 나온 책 ‘돈오돈오’(도서출판 리좀 발행·사진)의 한 대목이다. 책의 부제는 ‘문득 깨친 돼지와 까마귀’. 저자는 강원 양양의 구룡령 산채(山寨)에서 그림과 조각, 문필 작업을 하고 있는 박황재형 작가. 스스로 ‘삼희삼락(三喜三樂)’을 누리고 있다는 작가는 이번 책에 우주와 예술에 대한 사색의 결과를 담았다.

박황재형은 수묵담채화 분야의 거장 반열에 올라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화가다. 국내외 대학교수, 국선 심사위원을 역임하며 수십 회의 개인전과 수백 회가 넘는 단체전을 통해 공력을 선보였다. 그림뿐 아니라 전서와 초서를 융합한 글씨체의 서예가로서도 인정을 받았다. 인천아트플랫폼을 기획했고, 2005년에 펴낸 미학산문집 ‘metabeing’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로 필력을 과시했다. 사진 개인전을 열기도 했고, 설악산 주변 자락 돌에 생명을 불어넣는 조각을 함으로써 다방면에 걸친 예술가로서의 천재적 면모를 과시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작가는 홀연히 도시의 삶을 뒤로하고 구룡령으로 ‘행복한 망명’을 했다. 예술 본연의 모습을 추구하는 예술혼을 찾기 위해서였다. ‘넘거나 넘어가기를 멈춘 사람’이라는 뜻의 별호를 가진 지월당(止越當) 박황재형은 이후 7년여 시간을 구룡령에서 사유와 작품에 몰두했다. 이번 책은 그 고갱이를 모았다. 수묵 중심의 그림, 전서와 초서를 융합한 글씨, 산채 근처에서 구한 돌들로 만든 조각 사진, 그리고 글이 있다.

글은 ‘부엉이’ ‘지음’ ‘미술’ ‘경험’ ‘문화’ ‘동시대’ ‘약속의 땅’ ‘교통’ ‘발언’ 등 총 75개의 제목으로 이뤄져 있다. 각 편의 글은 짧지만 깊은 사유가 담겨 있다. 금방 읽지만 긴 여운에 잠길 수 있다.

단번에 책을 읽은 후 다시 찬찬히 새기면 좋을 듯싶다. 하루 한 번씩 눈에 들어오는 그림과 거기에 붙은 글 한 대목을 새기는 독법도 괜찮겠다.

‘우주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우주의 지극히 작은 일부일 뿐이며, 우주의 본체에서 보면 천둥, 번개, 태풍, 홍수, 가뭄도 모두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 거기에는 선도 악도 없습니다.’

‘이 세계에 잠시 머물다 가는 모든 유한적 개체들인 우리는 온갖 풍상을 겪으며 더불어 살다 차별이 없는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인간으로서의 생명활동이 정지돼 다시 절대 환원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 돌아가 마주치는 처음은 애초의 본래적 처음이 아니라,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되돌아가 마주치는 처음입니다.’

이렇게 우주와 인생에 대한 성찰이 있는가 하면 예술론, 특히 미술에 대한 사유도 있다. 그것들은 촌철살인의 비의(秘意)를 담고 있어 무릎을 치게 한다.

‘미술은 언제나 탈 세속화의 길을 걷고자 하면서도 늘 세속화되는 과정을 반복해 왔습니다. 탈 세속화의 세속화입니다. 이를테면 자본가를 비판하는 그림이 자본가들에 의해 수집돼지고, 그런 과정 속에서 작가는 아이러니하게도 부와 명예를 획득하게 됩니다. 그림은 시스템에 의한 계획된 방임의 형태로 세계에 대해 말하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책은 작가와 출판사 대표의 37년 우정이 낳은 산물이라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작가 박황재형과 출판사 리좀 대표 이재복. 강릉고 동창인 두 사람은 서울로 대학을 진학한 후 각기 화가와 기자로서 인생길을 걸어 왔다. 이 대표는 서울 생활을 접은 후 강릉에 출판사를 차렸고, 중앙의 유명 출판사들도 꺼리는 인문학 관련 서적들을 펴내고 있다.
　
그는 박황재형을 다시 만나 작품을 만난 그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림 속 깜냥(검정고양이)과 깜(검정부엉이)이가 그렇게 따뜻하게 보일 수 없었고 작품 설명에 담긴 범상치 않은 생각의 깊이로 즉석에서 바로 책을 만들자고 외쳤죠.”

이 대표는 중소도시인 강릉에서 인문학, 전통, 민속 등 지역의 정체성과 관련 있는 책을 펴내는 일이 힘들긴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기에 기꺼이 감당하고 있다고 했다. “직원 급여 등 최소한의 비용만 충당된다면 내일도 모레도 주저 없이 기획하고 찍어 낼 겁니다.”

‘돈오돈오’는 이런 소망을 지닌 출판인이 세상과 격절한 예술가 친구의 작품을 묶어 우리네 이웃들에게 선물하는 책이다. 177쪽. 1만5000원.

장재선 기자 jeije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