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성석제 작가는 “‘성춘향전’ 이후 춘향과 이몽룡은 어떻게 됐을지 궁금했다. 새 장편의 주인공 성형은 바로 그 자손에 해당하는 인물”이라며 “가상이고 익명의 인물이지만 그런 조상들을 통해 현재 우리의 삶도 존재할 수 있음을 말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문학동네 제공

- 왕은 안녕하시다 /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질릴만큼 익숙한 숙종 역사에
가상의 인물로 활극처럼 꾸며

왕실의 결정적 순간 흐름 바꾼
‘보이지 않는 손’ 활약상 생생

냉혹한 역사속 유머와 분방함
성석제만의 작법에 술술 읽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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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태여 또 하나의 익숙한 이야기를 더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회의가 있었는데 벌의 생태에 관한 책을 읽고 반드시 이 소설을 써야만 할 당위성을 발견했다. 벌의 세계에서 여왕벌의 안녕이 전체 집단의 지속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듯, 조선 시대에 ‘왕의 안녕’은 민생과 체제 지속의 열쇠였다. 그렇다면 그런 왕의 지척에서 왕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던진 무명과 익명의 존재들은 과연 어떻게 살았을까.”

‘이야기꾼’ 성석제 작가의 신작 장편 ‘왕은 안녕하시다’(2권·문학동네)는 전작 ‘투명인간’ 이후 5년 만에 내놓은 작품이다.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에서 전반부를 연재한 뒤 오랜 시간을 들여 후반부를 쓰고 전체를 고쳐 완성했다. 장·단편을 포함해 그의 세 번째 역사소설로 조선 숙종 때가 배경이다.

어린 시절의 숙종과 우연히 만나 의형제를 맺은 주인공 성형(나)의 모험담이 흥미진진하면서도 유장하게 펼쳐진다. 나는 조선 팔도 최고의 기생방을 운영하는 할머니를 둔, 알건달에 파락호(난봉꾼)다. 글을 제대로 읽을 줄은 모르지만 물려받을 재산이 있으니 굳이 벼슬에 나아가 아웅다웅할 이유가 없다. 그저 ‘서리 맞은 홍시처럼 몰랑몰랑, 찌르면 찔리고 밟으면 곱게 찌그러지는 시늉을 하며’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으로 족하다.

그러나 장난처럼 의형제를 맺은 꼬마가 알고 보니 왕세자였고 얼마 뒤 그가 왕위에 오르자 나는 팔자에 없던 입궐을 하고 왕의 최측근이 된다. 이때부터 역사 속 익명의 존재인 나는 조선 후기 극심한 당쟁의 시기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왕의 안녕을 위해 동분서주한다.

우리에게 조선 숙종의 이야기는 이미 물릴 정도로 익숙한 편이다. 남인과 서인의 충돌,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둘러싼 왕실의 권력투쟁 등은 이미 수없이 많은 드라마와 영화의 소재로 사용됐다. 하지만 왕이나 권력자의 시선에서 다뤄진 것들이었다.

‘익숙함에 회의가 있던’ 성 작가는 이런 역사에 가상의 인물을 집어넣었다. 나는 비록 시정잡배 출신이지만 숙종과 애증의 관계를 바탕으로 그림자처럼 역사의 숨겨진 공간을 누빈다. 진기한 칼을 얻어 위기에 처한 왕의 목숨을 구하고, 할머니의 배경과 인맥을 바탕으로 장사 수완을 발휘해 왕실의 재산을 불린다. ‘구운몽’을 쓴 김만중을 형님으로 모시고, 장옥정(장희빈)의 미모와 총명함을 진작에 발견해 몰래 흠모하기도 한다. 즉, 나라와 왕실 권력의 향방을 가르는 결정적 순간을 지켜보거나, 이에 은밀히 개입해 흐름을 바꿔놓는 것이다. 이를 고전파 경제학 용어로 한다면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나 할까.

엄중하고 냉혹한 역사 속에 유머와 자유분방함을 지닌 나의 개입은 필연적으로 경쾌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시종일관 위기와 갈등이 끊이지 않지만 작가 자신을 투영한 듯한 나는 특유의 능청스러움으로 역사소설의 묵직함을 벗어던진 채 무협소설 같은 모험의 세계로 나간다.

그러면서도 성 작가는 대립과 암투, 소문과 민심, 인간의 욕망 등을 통해 권력의 본질에 대한 고민을 놓치지 않는다. 그는 “역사에서 악습을 무너뜨리고 불합리한 체제에 균열을 낸 무명의 존재는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아 자신의 유전자를 후손에게 물려주었는데, 그 후손이 바로 현재의 우리 자신”이라며 “결국 이 소설은 자신, 또는 우리 조상에 관한 이야기”라고 강조했다.

이번에도 성 작가 특유의 장기가 유감없이 드러나고 있다. 등장인물에 대한 쉴새없는 서사를 통해 해묵은 것도 새롭고 흥미롭게 버무리는 솜씨가 여전하다. 하지만 익숙함을 지우기 위해 만든 가상의 인물이라는 설정이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라는 점이 아쉽다. 드라마 ‘대장금’ ‘마의’,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관상’ 등 대중문화 속에도 역사의 명장면 안에 숨 쉬던 무명 또는 익명의 존재가 여럿 있었다. 1권 404쪽·1만4500원. 2권 424쪽·1만4500원.

김인구 기자 clark@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