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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준국 前 駐英 대사 前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세밑에 날아온 북한 김정은의 친서는 비핵화의 희망을 다시 일깨웠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늘어나고 있는 북핵 문제를 독자적으로 해결할 능력이 없다. 북핵 문제는 기본적으로 북한과 북한이 가장 두려워하는 미국과 북한의 명줄을 쥐고 있는 중국 사이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자면 북·미·중의 지난 20여 년 간 핵 관련 행동 패턴을 알아야 한다.

우선, 북한은 핵에 필사적이다. 3대 세습 내내 제재와 압력을 견디면서 핵 개발에 매진했다. 김씨 왕조 보존, 주체에 기반한 정체성, 강성국가 실현, 북한식 한반도 통일 등 북한의 국가목표 하나하나에 핵은 꼭 필요한 수단이다. 그래서 북한은 일방적으로 비핵화하겠다는 마음에 없는 얘기를 한 적이 없다. 십수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어떤 조건’에서 한반도 비핵화를 향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어떤 조건’이란 미국의 대북 적대 정책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고, ‘한반도’ 비핵화란 미국의 핵우산 제거도 포함된다는 뜻이다. 북한은, 수소탄과 인공위성 시험에 성공한 후 미국과의 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해 국제 위상을 높이고 경제발전까지 이룬 중국을 벤치마킹하고 있다.

한편, 미국은 북한이 항상 약속을 어겼다고 말한다. 그러나 북한과의 협상 결과를 과대 포장하는 경향이 있다. 1994년 제네바 협상 결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특별사찰이 5년 이상 뒤로 밀렸는데도 미국은 잘된 협상이라고 했다. 2007년 10·3 합의 때는 영변 핵시설의 ‘불능화’로 다시 가동하려면 6개월 이상 걸린다고 했으나, 북한은 몇 주 만에 재가동했다. 그 합의문에서 북한은 핵 신고서 제출을 약속했으나 ‘검증’에 대해선 약속한 게 없었다. 미국은 압도적인 국력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협상에서 필사적인 북한에 끌려간 경우가 많았다. 그 결정판이 지난 6월 싱가포르 합의문이다.

중국은 북한의 생명줄을 쥐고 있는 유일한 나라지만, 늘 ‘한반도 평화’ ‘한반도 비핵화’ ‘대화를 통한 해결’이란 옳은 말만 되풀이했다. 비핵화를 장기과제로 생각하는 중국은 핵 동결을 통한 상황 관리와 지정학적 이해관계에 치중했다. 중국에는 북핵보다 한반도에서 미국의 행동이 더 중요하고 우려되는 일이다. 같은 맥락에서 중국은 북핵 레드라인을 미국의 레드라인에 맞추는 흥미로운 현상을 보였다. 2017년 미국의 언행이 심상찮자 중국은 유엔안보리의 강력한 대북 제재에 적극 동참했다. 올해 불붙은 무역 전쟁과 군사적 갈등 속에서 북핵은 미·중 패권 경쟁의 종속변수가 될 공산이 커졌다.

2018년은 과거와 매우 다르게 시작했지만, 북·미·중의 과거 행동 패턴이 그대로 반복된 한 해였다. 북한은 조건이 충족되기 전에는 비핵화할 생각이 없음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했고, 미국은 최초의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논리를 수용한 엉성한 합의문에 서명한 후 근근이 상황을 관리하고 있으며, 중국은 핵 개발로 5년 이상 자국을 난처하게 만들던 북한이 갑자기 문을 열고 미국과 협상을 시작하자 안도하며 끌어안기에 바빴다.

우리는 가시적 현상 뒤에 작동하고 있는 구조적인 동인에도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국가안보에 관한 한 우리의 의식 수준이나 상대적 역량이 100년 전보다 결정적으로 나아졌다고 보기 어렵다. 진짜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선 진지한 대화 노력과 함께 우리의 힘을 꾸준히 길러야 한다. 북핵은 악화하고, 동맹은 약해지며, 안보에는 구멍이 난 2018년이라고 역사에 기록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