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사법부에서 정치판과 다름없는 행태가 나타나고 있다. 특정 성향의 인사들이 사법 권력을 장악하는 ‘코드화·이념화’도 넘어 이젠 ‘법관대표회의’가 대상과 혐의도 적시하지 않은 채 동료 법관(法官)들의 탄핵을 국회와 헌법재판소에 사실상 청원하는 결의를 했기 때문이다. 자체적으로 문제 해결 능력이 없음을 자인함으로써 지난 70년 동안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힘겹게 쌓아 올린 사법 독립의 공든 탑을 근저(根底)에서부터 허무는 해괴한 일이다.

비공식 기구였다가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이후 대법원 규칙에 근거를 마련한 전국법관대표회의는 19일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연루된 현직 판사들에 대해 ‘탄핵 소추도 검토돼야 한다’는 안건을 의결했다. 법관의 탄핵 소추는 재적 국회의원 3분의 1이상 발의에 과반 찬성으로 의결되며, 탄핵 결정은 헌법재판관 6명 이상 찬성으로 확정된다. 법관 신분을 강력히 보장하는 것은 재판의 독립을 지키기 위함이다. 현직 법관이 탄핵된 전례도 없다. 그만큼 중대하고 엄중한 일이다. 법관 탄핵을 다른 두 헌법기관에 자청하려면 그 대상과 혐의를 명명백백히 소명하는 게 대전제다. 이런 본질적인 것은 제시하지도 않고 얼버무리는 식으로 탄핵을 요청하는 것은 법관으로서의 기본 자질부터 의심케 한다.

법관대표회의에서 탄핵에 찬성하는 판사들은 “사법부를 불신하는 국민 여론 감안” “탄핵 건의로 자성하는 모습” 등의 주장을 했다고 보도됐다. 정치권의 공방도 조목조목 나름의 논리를 열거하는데, 이런 정치판보다 못하다. 그런 논리를 연장하면 ‘여론재판’‘정치재판’을 하자는 것 아닌가. 실제 재판도 그런 식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이 중대하다고 주장하지만, 정반대 의견도 상당하고 설사 그렇더라도 탄핵을 자청할 정도는 아니다. ‘판사 블랙리스트’ ‘재판 거래’ 의혹은 3차례에 걸친 자체 조사 결과 근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공소장에 전·현직 법관이 93명이나 거론되고 있지만 사실관계 확정까지는 갈 길이 멀다.

이미 사법부 신뢰는 많이 추락했다. 국민이 법관과 재판에 ‘정치’가 개입됐다고 여기면 그만큼 법치 아닌 연줄이나 주먹에 기대려 할 것이다.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한다.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지는 데는 김 대법원장의 책임이 가장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