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함락된 도시의 여자’를 스크린으로 옮긴 영화 ‘아노니마: 베를린의 한 여인’의 한 장면. 자료사진

- 함락된 도시의 여자 / 익명의 여성 지음, 염정용 옮김 / 마티

익명 베를린여성 ‘2개월 일기’
기록 넘어선 뛰어난 전쟁문학

식량 배급행렬에 포탄 떨어져
사람 죽어도 태연한 자신 놀라

강한 남자 찬미 나치세계 환멸
러 점령군 자행한 性유린 고발

1945년, 종전을 앞둔 베를린은 여자들의 도시였다. 전쟁이 시작된 1939년 당시 432만 명이었던 인구는 참전과 피란으로 점점 감소해 1945년에는 270여 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중에서 200만 명 이상이 여자였다. 베를린뿐이 아니었을 것이다. 남자들이 전쟁터로 나가버린 후방엔 여성들과 아이, 그리고 노인들만 남았을 테다. 그곳의 여자들은 어떤 전쟁을 치렀을까. 동부전선에서 밀고 들어온 러시아군이 베를린을 점령하기 직전인 1945년 4월 20일부터 러시아군이 철수하고 연합군의 점령 소식이 들려오는 6월 22일까지, 베를린에 남은 익명의 여성이 쓴 2개월간의 일기 ‘함락된 도시의 여자’는 이에 대한 흔치 않은 기록이다. 남성 중심의 전쟁에서 주목받지 못하고, 기록되지 못하고 봉인된 여성이 겪은 처참한 또 다른 전쟁. 전쟁과 여성이라는 이중의 피해를 입은 약자의 기록이지만 이는 살아남는 것이 최고의 목표인 그곳에서 벌인 생존의 기록이자 그 속에서도 스스로의 생명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 벌인 치열한 몸부림의 말들이다.

기록은 1945년 4월 20일, 폭격으로 집을 잃은 30대 그녀가 동베를린에 있는 지인의 5층짜리 건물의 빈 다락방으로 들어온 직후부터 시작된다. 그녀의 글은 감상에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교양있고, 사려 깊다. 기록을 넘어선 뛰어난 전쟁문학이다. “아무런 소식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없고, 누구도 우리를 걱정해 주지 않는 ”, 각자의 생명은 각자가 책임진 가운데 벌어지는 폭격, 경보, 대피, 배고픔과 배급을 받기 위한 긴 줄 서기 등 베를린의 일상이 세세하게 담겨 있다. 길게 늘어선 식량 배급 줄에 포탄이 떨어져 사람이 죽어 나가도 소매로 튄 피를 닦아내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줄을 서는 자신에게 놀라고, 이미 무정부 상태지만 그중에서도 지시를 내리는 사람이 생기고 사람들이 공동의 규칙을 만들어 가는 것에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 생각하기도 한다. 무기력한 군인들을 보며 강한 남자를 찬미하는 나치 세계뿐 아니라 남성이라는 신화 자체에 환멸을 느끼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기록의 중심에는 러시아 군대가 들어오면서 이들이 여성들에게 자행한 성적 폭력이 자리한다. 처음에는 필사적으로 피하던 여성들도 점점 무감각해져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라는 홉스의 말을 되풀이하며 온갖 늑대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가능한 한 높은 계급 장교를 만나려 하고, 여성들끼리 서로의 상처를 위로하기 위해 이를 유머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러시아 병사가 한 여성을 끌어내려 하자 함께 있던 남자가 “제발 빨리 따라가. 당신이 우리를 위험하게 만들고 있다”고 했다는 상황을 전하며 “서구 몰락에 대한 간략한 주석이다”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그녀는 스스로 “공포를 넘어 감각이 없는 인형이 됐다”면서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아직 인간임을 느끼기 위해 글을 썼다고 했다.

이 여성은 두 달간 남긴 이 기록을 1945년 7월 타자기로 작성하며 중요한 단어들을 문장으로 바꾸고, 기억을 더듬어 내용을 추가해 암시적인 부분을 명확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잿빛 군수용 타자 용지 121쪽 분량의 글을 완성해 몇몇 지인에게 보냈다. 치욕스럽고 참담한 기억이지만 기록으로 남겨야 하고, 이 기억과 기록이 공유될 때 역사를 넘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기록을 본 한 작가가 이는 개인의 체험을 넘은 시대의 기록이라며 뉴욕 출판사로 보냈고, 1954년 가을 무렵 영어판이 나왔다. 이어 영국 스웨덴 노르웨이 일본 스페인 프랑스 등에서 연이어 출간됐다. 독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치욕과 상처의 기록은 시간이 한참 지난 뒤인 2002년에야 출간됐다. 그 뒤 필자는 저널리스트 출신인 마르타 힐러스임이 밝혀졌다. 344쪽, 1만6000원.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