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큰 전쟁이 끝나면 평화가 찾아온다고 생각하지만, 1차 세계대전 이후 5년간 유럽은 지구 상에서 가장 폭력적인 공간이었다. 사진은 1918년 동부전선에서 대공세를 펼치는 독일군. 김영사 제공

- 왜 제1차 세계대전은 끝나지 않았는가 / 로버트 거워스 지음, 최파일 옮김 / 김영사

종전후 5년간의 유럽史 담아
끔찍한 무력 갈등으로 피폐화
민족국가 간 ‘영토전쟁’ 횡행
‘인종청소’ 참상의 뿌리 역할

11일은 종전 100주년 기념일
폭력의 악순환 여전히 진행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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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 기념일이다. 이날 파리에서 주최국 프랑스 정상을 포함해 미국, 러시아, 독일, 영국 등 60여 개국의 국가원수와 정부 수반이 참석하는 종전 기념식이 열린다. 1000만여 명의 전사자와 2000만이 넘는 부상자를 낳은 이 세계대전은 당시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전이었다. 세계는 얼마나 변했을까.

이 책의 제목이 시사하는 대로, 독일 출신의 더블린대 현대사 교수인 저자는 1차 대전을 다른 관점과 시기에서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1차 대전은 1914년 6월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세르비아의 한 청년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을 계기로 8월 전 유럽으로 확산되고 미국과 일본까지 참전한 뒤 1918년 11월 4년 반 만에 끝났다. 1차 대전 종전 후 영국 작가 H G 웰스는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었다고,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세계를 민주주의에 더 안전하게 만들기 위한 전쟁”이었다고 높게 평가했다. 전쟁 전 유럽이 한동안 누렸던 평화의 시기가 재도래했고 민주주의가 정착해갈 것이란 의미다.

이 책의 저자는 종전이 선언된 1918년 11월부터 1923년 7월 터키 국경선을 확정한 로잔협정까지 5년간을 다룬다. 이 시기 서쪽과 북쪽의 라인강과 알프스, 동쪽의 시베리아, 남쪽의 아나톨리아에 이르는 유럽의 상당 지역에서 벌어진 끔찍한 무력 갈등으로 죽은 사람의 숫자가 400만 명을 훌쩍 넘었다. 대전 당시 영·프·미의 전사자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 그 참상은 한마디로 도축이라 할 만큼 참혹했는데, 포로나 민간인을 십자가에 못 박거나 공개적으로 잔인하게 훼손하며 죽였고 아이들을 우물에 던졌으며 강간이 횡행하는 지옥 같은 상황이었다. 이를 윈스턴 처칠 같은 당대의 관찰자들은 ‘피그미들의 전쟁’이라고 외면했으며, 이후 역사학자들도 오랫동안 간과했다. 독일 작가 에른스트 윙거가 “이 전쟁(1차 대전)은 폭력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말한 이유다. 참상은 대전의 패전국을 중심으로 나타났다. 2016년 출간한 이 책의 원제목은 ‘패배자(The Vanquished)’로, 저자는 그 의미에다 피비린내 나는 잔인성 속에서 호모 사피엔스 모두가 패자였다는 뜻도 담은 듯하다.

오늘의 세계를 결정지은 파국의 시기이기도 했던 5년은 다양한 형태를 띤 갈등 양상을 보였지만 ‘민족’과 ‘혁명’이라는 두 단어 속에 함축할 수 있다. 저자는 중첩되기는 하지만 최소 세 가지의 유형으로 나누는데, 그 하나는 승전국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오스만제국 등이 붕괴하며 민족국가가 대두된 점이다. 윌슨의 ‘위선적인’ 민족자결주의가 영향을 미쳤는데, 종족 구성이 복잡한 영토들에 민족자결 원칙을 적용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순진한 구상이었다. 20만 명의 전사자가 나온 그리스-터키 전쟁이나 25만 명이 사망한 러시아-폴란드 전쟁이 대표적 민족국가 간 영토전쟁이다. 러시아, 핀란드, 독일 일부 지역처럼 사회 혁명, 즉 내전의 형태를 띠기도 했다. 발트 3국 등의 경우는 민족 혁명, 즉 독립 전쟁의 형태였다. 당대 유럽 내전의 배후에는 대전 중 발생한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의 공포와 희망이 드리워져 있다.

유럽은 1917년과 1920년 사이에 무려 27차례의 폭력적 정권 교체를 경험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살육의 상황에서 대중은 질서와 규율을 앞세운 반민주적인 프로파간다에 현혹됐다. 전승국이었지만 패전국과 다름없는 상처를 안은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와, 29세에 대전에 참전해 씻을 수 없는 굴욕을 안은 히틀러의 등장은 이런 상황에서 가능했다. 1930년대 중반 유럽에서 노골적인 독재정권은 당연한 것이 됐다. 제2차 세계대전은 어찌 보면 ‘전후 5년’의 시기에 배태됐다고 볼 수 있다. 또 전쟁의 목표가 특정 영토를 획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계급의 적’이나 ‘민족의 적’과 같은 ‘이질적인 분자’를 일소해 동질적 민족 공동체를 수립하는 것으로 바뀐 것도 이 시기라고 저자는 말한다. 나중의 세르비아 ‘인종청소’ 같은 참상도 그 뿌리는 끝나지 않은 1차 대전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전후 5년’의 시기는 “2차 대전과 추후 폭력의 악순환 논리와 목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끝을 맺는다. 508쪽, 2만2000원.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