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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보 예르비의 취리히 톤할레

피아니스트 부니아티슈빌리의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2번 연주
낭만적·드라마틱…춤추듯 유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과 말러 교향곡 5번. 최근 몇 년간 클래식 음악계에서 가장 많이 연주된 곡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그래도 애호가들은 또 연주회장에 간다. 현대미학의 선구자 발터 베냐민은 예술작품이 가치를 지니는 이유에 대해 “지금, 여기”에 있기 때문이라 단언했다. 변화돼온 역사를 품은 채 유일무이하게 ‘현존’해 있는 그 가치를 ‘아우라’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지난 3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은 피아니스트 카니아 부니아티슈빌리, 지휘자 파보 예르비와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사진)의 아우라로 채워졌다.

부니아티슈빌리는 라흐마니노프가 써놓은 낭만적인 선율, 현란한 기교와 격정적인 분위기를 춤을 추듯 유려하게 표현했다. 1악장 도입부부터 감정을 가득 실어 압도적인 에너지를 드러내더니 느린 악장에서는 농축된 감정들을 자유롭게 펼쳐 보였다. 매혹적인 빠른 패시지에서는 세분화된 뉘앙스들을 드라마틱하게 연출했다. 누구라도 반할 만큼 관능적이면서도 다정다감한 감정에 충실한 그의 아우라는 마치 영화 ‘캐롤’ 속 케이트 블란쳇의 그것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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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니아티슈빌리는 이번에 무대에 함께 오른 지휘자 예르비, 그리고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이 작품을 녹음해 발매한 바 있다(소니클래시컬·2017). 당시 그의 라흐마니노프 해석에 대해 그라모폰지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만 치중한 연주라며 “그의 팬들을 위한 음반”이라는 부정적인 평을 실었다. 이 음반이 아니더라도 그의 무대에는 때때로 논리가 부족하다거나, 깊이가 없다거나, 쇼맨십이 강하다 등의 평이 따른다. 그러나 그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보인다. 이번 무대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적극적으로 음미하며 표출하고, 그 충만함을 능숙하게 다루는 모습을 보여줬다. 확신에 찬 아름다운 몸짓은 결코 과장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러워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그는 자신을 향한 박수에 보답할 줄 아는 클래식 ‘스타’이기도 하다. 환호하는 객석을 향해 연신 손 키스를 보내더니, 바흐의 칸타타 BWV208과 리스트 ‘헝가리 광시곡’ 2번을 앙코르로 선택해 자신이 지닌 장점을 어필했다. 부니아티슈빌리는 진정으로 음악과 무대를 즐기는 예술가다.

예르비와 그가 내년 가을에 상임지휘자로 부임할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가 들려준 말러 교향곡 5번은 그야말로 말러 혁명의 부활이었다. 특히 2악장, 현악기 군단이 끝없이 추락하고 침잠하는 부분은 등골이 서늘할 만큼 그 무게감과 처절함이 대단했다. 현악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굴곡진 힘을 예르비는 다이내믹을 최대로 끌어올려 객석에 전달했다. 금관 파트의 날 선 코랄풍 선율까지 고독한 거리를 비틀거리는 말러의 모습을 상상하게 할 만큼 생동감이 넘쳤다. 예르비는 3악장의 다채로운 음악적 텍스처를 세세하게 지시하기보다는 지휘봉을 크게 돌려가며 추진력을 강화했다. 무엇보다 예르비가 끌어당기는 짜릿한 리듬감은 압권이었다. 가곡 ‘나는 세상에서 잊혀지고’를 노래하는 꿈꾸듯 서정적인 아다지에토를 지나 마지막 5악장에서는 흩어진 파편들을 한데 모아 폭발적인 격정으로 몰아붙였다.

예르비와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는 어쩌면 1악장에서 마주했던 ‘죽음’을 환희로 승화시키는 것이 아닌, 죽음 그 너머의 세계를 그리고 싶었던 것일지 모른다. 그만큼 거칠게 역동하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정신의 고양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예르비의 아우라는 오는 12월 19일 도이치 카머 필하모닉(힐러리 한 협연)과의 내한 무대에서 다시 한 번 목도할 수 있다. 말러가 살던 시대보다 백여 년을 거슬러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5번과 슈베르트 교향곡 9번 ‘그레이트’를 지금, 여기로 불러낼 예정이다.

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 빈체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