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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교 국제부장

캐나다 군의관 존 매크레 육군 중령은 1915년 5월 3일 벨기에 플랑드르 지방 이프레의 야전병원에 쪼그려 앉아 시를 써내려갔다. 그는 ‘플랑드르의 들판에 양귀비꽃 피었네’로 시작해 전쟁의 아픔과 비극, 의무를 그리면서 전날 흙 속에 묻은 친구 알렉시스 헬머 중위를 추모했다. 아마 헬머의 묘지 주변에 전장의 선혈처럼 검붉은 양귀비가 피어 있었던가 보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이어주던 양귀비는 매크레의 시가 잡지에 발표되면서 1차 세계대전을 상징하는 꽃이 됐다.

2018년 11월 11일 11시 세계 각국 지도자 60여 명은 파리에 모인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1차 세계대전(WW1) 종전 100주년 기념식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전쟁을 일으켰던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 등을 초청했다. 시차를 두고 같은 시간, 미국과 캐나다 전역에서는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일명 벨 오브 피스, 평화의 종이다. 100년 전 이날 새벽 5시 프랑스 육군 원수 페르디낭 포슈는 연합군 대표들과 파리 북동쪽 콩피에뉴 숲속 열차 안에서 독일의 항복 문서를 받았다. 여섯 시간 뒤 오전 11시 ‘모든 전쟁을 끝내는 전쟁’이라는 1차 세계대전의 포성은 멈췄다. 탐욕과 포악의 대가는 컸다.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그늘에서 4년 3개월 동안 군인 802만 명과 민간인 664만 명이 숨졌다.

65년 전 중지됐던 6·25전쟁 종전이 추진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을 위한 종전인지, 누구를 위한 종전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완전한 비핵화 진전이 없는 종전선언은 북한 체제의 정당성만 확보해줄 뿐이다. 최악의 인권탄압국가인 북한의 3대 세습 독재정권에 승인 도장을 찍어주는 셈이다. 더구나 북한은 지금도 6·25전쟁을 한국의 북침에 맞선 민족해방전쟁이라고 주장한다. 북한에 면죄부를 주지 않으려면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부터 인정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종전선언을 평화체제의 진입구로 바라보는 시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다. 북한이 비핵화에 나서면 옳은 경로지만 반대라면 재앙으로 향하는 지름길이 된다. 종전은 항구적 평화를 보장하지도 못한다. 1차 세계대전 배상 책임을 독일에 물은 1919년 베르사유 강화조약은 2차 세계대전을 불러왔다. 일본에 태평양전쟁 책임을 물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결국 전쟁과 평화는 종전선언이 아니라 파워 국가의 결정에 따라 갈린다.

세계 각국 지도자들은 파리에서 전쟁이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고 외칠 것이다. 하지만 속마음은 어떨까. 자국민이 전쟁에 내몰리지 않도록 강력한 힘을 가져야 한다고 다짐해야 진정한 지도자다. 청와대는 문재인 대통령을 ‘낙관주의자’라고 말하지만, 북한이 비핵화에 나서지 않으면 ‘미스터 로맨티시스트씨’가 될 수도 있다. 1일 시작된 남북한 적대행위 중단이 국군 전력 약화로 이어진다면 매국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열흘 뒤면 인류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을 반성하는 조종(弔鐘)이 울린다. 우리는 100년 전에는 지켜야 할 나라조차 없었다는 과거를 되새겨야 한다. 그리고 6·25전쟁 종전선언에 앞서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흘렸던 그 많은 붉은 피를 기억해야 한다.

jk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