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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돈재 前 국가정보원 1차장

1973년 4차 중동전쟁 때 일이다. 이집트의 기습공격 첩보가 계속 입수됐지만, 미국과 이스라엘 분석관들은 이집트가 질 것이 뻔한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해 개전 초 심각한 손실을 봤다. 그들은 1967년 6일전쟁에 참패한 이집트가 전쟁에 지더라도 아랍민족의 긍지를 살리고 아랍권의 맹주(盟主)가 되기 위해 전쟁을 벌일 것이란 점을 간과했던 것이다. 자신의 사고방식으로 상대를 판단하는 자기반사적 오류(mirror imaging·鏡像)에서 비롯된 정보 실패다.

그동안 미·북 핵 협상 과정을 보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도 이런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게 아닌지 의구심을 갖게 된다.

첫째, 북한이 제재를 견디다 못해 협상 테이블에 나왔다는 생각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그런 말로 트럼프 대통령을 치켜세웠지만, 한국 정보분석가들은 지난해 후반 북한이 서둘러 핵과 미사일 실험을 계속하자 북한이 연내 핵무력을 완성한 다음 새해부터 평화 국면으로 전환하려는 의도라고 예측했다. 200만 명을 굶어 죽게 하고도 핵 개발을 계속해 온 세습 정권이 유엔의 본격 제재가 시작된 지 2년도 안 돼 굴복했다고 생각한다면 북한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다.

둘째, 협상을 통해 북핵 문제의 해결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많은 사람이 ‘혹시나’ 하고 기대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역시나’가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리용호 북한 외무상은 이란에서 “한반도의 비핵화는 지지하지만, 핵 지식은 보존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은 최근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 앞으로 보낸 서신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하면 핵·미사일 활동을 재개할 수 있다’고 위협했다. 미국 협상가들은 북한의 이런 태도를 협상력 강화를 위한 제스처라고 생각하겠지만, 이제까지 북한의 태도로 미뤄 보면 완전한 비핵화는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시이고, 미국에 보내는 통보라고 봐야 한다.

셋째, 김정은을 잘 치켜주고 구슬리면 핵 폐기가 가능할 것이란 생각이다. 북한은 형편없는 나라이나 외교는 매우 강하다. 최고의 엘리트들이,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수십 년 동안 같은 일을 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독재체제지만 정책 결정은 나름 많은 토의를 거쳐 신중하게 이뤄진다는 강점(强點)도 갖고 있다. 거친 파도가 유능한 사공을 만든다는데, 북핵(北核) 문제가 불거진 지 이미 30여 년이 돼 가고 있다. 게다가 김정은이 집권한 지 7년이 됐고, 그는 젊고 배짱과 순발력도 있다. 더욱이 1994년 제네바 합의와 2005년 9·19 공동성명 협상 과정에 미국 등을 농락해 온 북핵 강경파들이 여전히 버티고 있다. 김정은과 북한 정권이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넷째, 지금 문 정부의 태도를 한국민의 일반적 정서가 반영된 것이라고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그동안 문 정부는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 추진, 개성 상호연락사무소 개설, 철도·도로 연결 공사 추진 등에 이어 최근에는 유엔사의 권한을 침해하는 북한과의 군사합의, 5·24 조치 해제 검토 등으로 미국과 각을 세우고 있으나 한국민의 보편적 정서와는 다르다.

트럼프 대통령 화형식은 방치하면서 김정은 화형식을 했다고 현역 국회의원에게 소환장을 보내는 경찰이 제정신인가. 지난주 제주 서귀포 앞바다에서 열린 관함식에 참가한 미국 항공모함 로널드 레이건호가 입항 반대 및 반미 시위대 때문에 입항을 포기한 것이 한국민과 등지게 하는 원인이 되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