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디지털 영상 캡처 이미지의 중첩을 통해 현대인의 실상을 조명하고 있는 작품인 페넘브라 퍼미티드(Penumbra-permeated, 반영-스며듦) NS41108281(106×446㎝, 2018). 김창수 작가 제공

김창수 ‘반영-스며듦’판화展

소녀·어머니·남녀 대학생 등
제 모습 잃고 혼돈스럽게 겹쳐
脫개성·익명화된 개체 시각화

레이어 덧붙이고 떼내고 반복
修行 연상시키는 단색화 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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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3년 헝가리 죄르 국제판화비엔날레 심사위원회는 한국인 최초로 작가 김창수(사진)를 대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당시 심사위는 ‘명멸-교차-인사31’이란 제목의 출품작에 대해 디지털 이미지 캡처와 픽셀 등으로 제약된 시간을 공유하는 현대인의 의식적 실체를 표현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국내 화단은 ‘디지털 프린팅’을 연상시키는 그의 작품에 주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작가는 묵묵히 자신의 작업을 계속했다.

그리고 15년이 흘렀다. 당시 경원대 디자인학부 부교수였던 그는 지금 가천대 미술디자인학부 학부장이다. 그러나 변화한 것은 직함뿐만이 아니다. 그는 계속 진화해 왔다.

김창수 작가의 개인전 ‘반영(半影)-스며듦’ 전이 24일부터 30일까지 서울 종로구 관훈동 동덕아트갤러리(02-732-6458)에서 열린다. 초기작보다 더 섬세해진 제작기법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까지 곁들여져 원숙미가 물씬 풍기는 작품 40여 점이 전시된다. 가로 사이즈가 2∼9m에 이른 대작만 7점 이상 전시된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에 대해 그는 레이어(layer)라는 디지털 이미지의 속성에 주목했다고 설명한다. “픽셀과 의미의 조합을 넘어, 중첩된 시간들을 모아 하나로 구축해 본다. 내가 만들어 가는 이미지들은 순간들을 정지시킨 단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중첩된 시간들을 엮어낸 인위적 창작물에 가깝다. ‘본다’라는 행위의 의미보다는 오히려 본능적으로 ‘맺는다’에 가까운 이미지들을 만들어가며, 또 다른 변용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거리의 풍경이 묘사된 그의 작품을 실제로 보면 여러 개의 영상이 겹쳐져 화면 속 사람들의 구체적인 형상이 깨지고 뭉그러져 나타난다. 소녀와 소녀의 어머니, 그 뒤편의 아저씨와 남녀 대학생 등 수많은 사람이 모두 개성적인 제 모습을 유지하지 못한 채 혼돈스러운 픽셀과 레이어의 층위에서 표류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회라는 시스템 내에 존재하는 작동원리로서의 수많은 기존 원칙과 체계 속에서 개인은 어떤 존재이자 의미인가에 대한 화두를 던짐으로써, 도시 또는 사회 문명의 기술적 발전이 개개 자아에게 미치는 긍정적 효과보다는 점차 익명화·탈개성화되는 구성원으로서의 자아에 대해, 잃어가는 개체로서의 가치에 대해 재조명해 보고, 보이는 것 이면에 담겨 있는, 변화하는 시대를 살아가며 우리가 잃을 수 있는 것들을 시각화해보고자 한 것이다.”

김 작가의 작품은 엄밀히 말하면 판화가 아닌 미디어아트 결과물에 더 가깝다. 그러나 작가는 판화를 고집한다. 그의 작품이 디지털 출력물임에도 분명히 에디션(한정판)을 둔다는 점에서 판화와 가깝기는 하다. 국제적으로도 에디션이 있는 디지털 출력물은 사진과도 같이 판화 장르로 인정된다. 에디션이 있는 판화와 달리 단순한 디지털 영상은 무한 출력이 가능하다.

그는 직접 촬영한 결과물을 놓고 미시적으로 끊임없이 레이어 화면을 캡처해낸다. 그리고 마치 붓질하듯 레이어를 계속해서 덧붙이고 떼어내기를 반복해 작품을 완성한다. 작품 제작과정만 보면 마치 ‘수행’을 연상시키는 ‘단색화’ 기법과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김 작가의 결과물이 지니는 작품성과 예술성은 제작과정에 바치는 작가의 그 같은 노력과 영감이 있기에 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 경계 안쪽에 판화이자 또 다른 변모를 유추하게 하는 가능성으로서의 그의 작품이 있다.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