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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기 한선재단 통일연구회장, 국민대 초빙교수

남북 정상이 18∼20일 평양에서 세 번째 만나고 있다. 세인들은 이번 만남이 ‘북핵 폐기’와 ‘남북관계 발전’이라는 상충된 목표의 실마리를 찾지 않을지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다. 선후경중(先後輕重)의 문제를 고려하면 당연히 ‘선(先) 북핵 폐기, 후(後) 남북관계 발전’의 구조로 진행돼야 한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관계 발전을 우선하는 발언을 해 왔다. 8·15 경축사에서는 “남북관계 발전이 비핵화를 촉진시키는 동력”이라 하고, 지난 7일 외신 인터뷰에서는 “남북관계를 돌이킬 수 없게 진도를 낼 것”이라고 했다. 특히 ‘비가역적 경제적 진도’ 발언은 경제 협력을 통해 한반도 신(新)경제지도를 완성하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는 특별수행원에 기업인 등 경제계 인사 17명이 포함된 것과 무관치 않다. 청와대는 부인하지만, 북한 요청으로 대기업 총수의 묵시적 동행이 이뤄졌다는 사실은 남북관계 발전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는 또 다른 방증이다.

김정은의 2018년 신년사는 ‘핵 있는 상태에서의 민족 공조(대화와 협력)’가 핵심이다. 북한이 이렇게 국면 전환 카드를 내밀 수밖에 없었던 것은 국제 공조를 통한 최대 압박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국제 공조의 최대 압박은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평화적 수단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따라서 정부의 선 남북관계 발전, 후 북핵 폐기의 구도는 분명 잘못된 전략적 선택이다.

대통령과 동행 방북한 대기업 총수들은 첫날인 18일 북한 경제담당 내각 부총리와 만나 ‘통일을 위한, 또 평화 번영을 위한 지점’을 논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본 유치와 경제 협력은 감성적 민족 공조만 가지곤 한 발짝도 진전할 수 없다. 즉, 국제 공조의 최대 압박이란 높은 허들이 엄연한 상황에서 민족 공조는 공염불일 뿐이다. 또한, 남북 경협(經協)이 관련 기업의 명운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중해야 한다.

국제사회가 대기업 총수의 방북을 남북 경협과 연계해서 생각하고 반응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유엔 안보리는 ‘비확산 및 북한’이라는 주제로 지난 17일 대북 제재 결의와 관련된 긴급회의를 개최했다. 대북 제재의 구조적 허점이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발생해 북핵 폐기의 가능성을 희박하게 만들고 있다는 우려 때문에 열렸다. 한국도 북한산 석탄 밀반입 및 유류 밀반출과 관련해 구조적 허점을 조성했다는 합리적 의심을 받고 있다. 이는 한국이 북핵의 최대 위협국이라는 엄혹한 현실을 무시한 자해행위나 다름없다.

4차 핵실험 이후 남북한의 군사력은 한국은 100, 북한은 130이라고 한다. ‘북한의 핵 독점’이 대한민국의 안보 환경을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만들었다. 이런 현실에서 남북관계 발전은 오히려 ‘북한의 핵 독점’을 더욱 강화시켜 한국 안보에 부메랑이 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물론, 북핵 폐기가 이뤄진다면 한반도 신경제지도의 구상을 현실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핵이 있는 상태에서의 평화나 경협은 신기루일 뿐이다.

‘핵 독점’의 기울어진 운동장은 우리가 항상 북핵 공포의 위협에 노출돼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현 정권은 오도된 평화와 우리 민족끼리에 도취해 위협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북핵 공포 때문에 우리의 자유가 심대하게 훼손되고 평화로운 생존권이 침해당하고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결국, 남북 경협의 과속(過速)은 득보다 실이 많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북핵 폐기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