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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민 정치부 선임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 꼭 지켜야 할 세 가지’로 꼽은 것은 경제, 안보, 통합이었다(문재인, ‘대한민국이 묻는다’). 지금 이 소중한 세 가지가 다 무너지고 있다. 이 중 첫째로 꼽았던 경제는 더욱 심각하다. 정부가 속도감 있게 추진하겠다는 소득주도성장론이 경제를 속도감 있게 추락시키는 중이다. 격차주도성장론, 실업주도성장론이란 말이 나돈다. 시장에서는 한국 경제가 침체기에 진입했다는 말이 파다하다. 경제전문가인 지인이 소셜미디어에 올린 표현을 빌리자면 ‘상돌팔이 진단과 처방으로 대한민국 경제가 떡실신 중’이다.

소득주도성장론의 핵심 논리 중 하나는 ‘기업소득의 가계소득으로의 이전을 통한 가구소득 증대’다. 학계에서는 거의 폐기된 임금주도성장론의 변형인 이 희한한 정책 실험은 최초의 선한 의도와는 관계없이 성과 면에서는 거의 실패했다. 얼마 전 발표된 분기별 가계소득 통계에 따르면 최상위 가구의 소득은 늘었고 최하위는 줄었다. 그러자 사흘 만에 통계청장의 목이 날아갔다. 경제는 어려워지고 일자리는 줄고 소득 분배구조는 악화하는 이 시점에 청와대 정책 참모들은 멀쩡히 살아남고 국가통계 책임자는 교체돼 눈물의 이임식을 했다. 신임 통계청장은 “좋은 통계로 보답하겠다”고 말했다. 권력이 통계를 갖고 장난치려 한다는 의혹이 난무한다. 국회의 국정조사가 필요한 이유다.

쫓겨난 황수경 전 청장이 정권의 기대에 부응하는 결과물을 내놓지 못한 건 사실인 것 같다. 그는 떠나면서 “내가 말을 잘 듣는 편은 아니었다”고 했다. 공직사회는 자신의 최종적인 주인인 국민이 아니라 조직의 보스나 권력의 눈치를 먼저 보는 순간 생명력을 잃는다. 말을 안 들어 누군가 쫓겨났다는 의심 사례가 생기면 자율과 창의는 들어설 땅이 사라진다. 구체적으로 누가, 어떤 경위로 황 전 청장의 경질을 건의했으며 실행에 옮겼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국가통계를 주물러서라도 소득주도성장론을 뒷받침해야겠다는 국가주의자들의 소행일 가능성이 있다. 통계청장 해고 사건은 정권 입맛에 맞는 성과를 내지 못할 땐 언제든 날려버릴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는 점에서, 100만 공직사회에 대한 공갈·협박이다. 국정조사가 필요한 또 다른 이유다.

국가주의자들은 소득주도성장론을 뒷받침하는 코드 통계가 만들어지면 만족할까. 그래서 ‘통계주도성장론’이라도 만들어 보겠다는 건가. 그럼 경제가 좋아지나. 권력의 무지와 무책임, 무도함에 회의(懷疑)가 밀려온다. 통계 격언은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거짓말은 종종 숫자로 장난치려는, 위기감에 사로잡힌 정치인과 국가에 의해 이뤄진다. 나치 독일이 전사한 아군 숫자를 줄이고 적군의 만행을 부풀리는 통계 조작을 했던 건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 패색이 짙어질 무렵이었다. 프랑스대혁명도 통계 조작 폭로로 불붙었다. 그리스를 유럽의 낭인(浪人)국가로 이끈 것도 그렇다. 통계 장난은 국가범죄다. 그에 대한 유혹이 혼군(昏君)을 속이고 권력을 오염시킨다. 황 전 청장 재임 시 통계청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훼손하는 청와대의 압력과 간섭이 있었는지, 그걸 따지는 게 국정조사의 핵심이다. 국회가 국정조사권을 발동해야 할 이유가 차고 넘친다.

mins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