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이가영은 “관객들이 제 배역을 알아봐 주실 때 참으로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유니버설발레단 포토그래퍼 김경진

(上) 유니버설발레단 이가영

고교 졸업후 바로 프로 입문
대학교 다니며 발레단 병행
최근엔 ‘춘향’ 등 리허설 열중

“자존감 떨어지고 부상도 겪어
쉬는 기간 좋았지만 잠시일뿐
주역 꿈 이루려 날마다 담금질”

발레, 뮤지컬, 연극 등 공연 무대의 스포트라이트는 당연히 주역에 쏠린다. 그러나 주역을 뒷받침하는 다른 배역들의 역할이 없다면 무대가 빛날 수 없다. 발레의 군무, 뮤지컬의 앙상블, 연극의 서브 조연 등. 주인공 옆에서 혹은 뒤에서 묵묵히 자기 역할을 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이들은 미래의 주역을 꿈꾸기도 하지만, 현재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땀을 흘린다. 자리가 어디이든, 어떤 배역이든 무대에 서면 언제나 주인공이다.

“이가영 씨는 군무단원이긴 하지만 주요 배역을 맡으며 성장하고 있습니다. 실력과 품성, 그리고 열정을 모두 갖춰 저희 발레단 유망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유니버설발레단 관계자의 말처럼 이가영(22)은 지난 2015년 입단 이후 날로 성장하고 있는 무용수다. 발레리나 등급으로는 낮은 단계인 코르 드 발레(군무 담당)지만, 가끔 독무를 맡을 정도로 인정을 받고 있다.

부산에서 태어난 그는 6세 때 발레를 시작했다. 우연히 지역 축제에서 대학생들의 발레 공연을 본 후 “저 옷을 입어보고 싶다”고 부모를 졸라서였다. 초등 3학년 때부터 발레리나가 되기 위한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그는 3년 후 어머니와 함께 상경했다. 이른바 발레 유학을 온 것인데, 그로 인해 부모는 주말 부부가 됐다. “저를 위해 부모님이 희생하셨으니 참 죄송하고 고맙지요.”

선화예중·고에 입학한 그는 “서울 아이들에 비해 실력이 뒤졌기 때문에 따라잡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다행히 그는 발레리나에 적합한 신체조건을 지녔다. 176㎝의 큰 키와 긴 다리, 서구적인 외모.

그는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프로 무대로 입문했다. 그의 가능성을 눈여겨본 유니버설발레단의 문훈숙 단장과 유병헌 감독이 권했기 때문이었다. 발레단에서 활약하며 대학에 들어간 그는 현재 성신여대 학생이기도 하다. 입단한 해에 ‘잠자는 숲 속의 미녀’에서 라일락 요정 역할을 했다. 주인공 남녀를 만나게 해 주는 비중 있는 역이었다. “긴장감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발레단의 언니들이 ‘가영아, 파이팅’이라며 응원을 해 줬습니다. 그 덕분에 공연을 잘 마칠 수 있었지요.”

발레단에서 꾸준히 활동하던 그에게 지난해 초 느닷없이 슬럼프가 찾아왔다. “자존감이 크게 떨어지면서 발레가 싫어졌어요. 크게 다쳐서 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지요. 길에서 마주 오는 차를 피하지 않을 정도였어요. 또래 친구들은 자유롭게 놀러 다니며 재미있게 사는데, 나는 발레에만 갇혀 있다는 답답함이 있었던 듯싶어요.”

그런 심정에 사로잡혀 있었던 탓인지, 그는 모던 발레 작품 리허설을 하다가 넘어져 인대를 크게 다쳤다. “부상을 당했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호호. 쉬는 기간에 보고 싶은 드라마도 보고, 먹고 싶었던 것도 먹고.”

그런데 그렇게 좋았던 것도 잠시였다. 시간이 지나니 발레가 그리워졌고, 자신의 옛날 영상을 보며 “내가 저렇게 열심히 춤을 췄구나”라는 것을 자각하게 됐다. “‘내가 마음을 잘못 먹어서 정말 소중한 것을 놓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요.”

이미지 크게보기 올 7월과 8월 무대에 올랐던 유니버설발레단의 ‘돈키호테’. 이가영(가운데)은 2막에서 솔로로 숲의 여왕 역할을 했다.

그는 발레단 복귀 후에 춤을 추는 일이 이전보다 더 즐겁다고 했다. 어떤 역할이 주어져도 무대에 서 있기만 하면 행복하다는 것.

물론 그도 주역을 꿈꾼다. 강미선, 홍향기, 이동탁, 이현준, 강민우 등 선배 무용수들이 주요 배역을 맡았을 때 치밀하게 연구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며 많은 것을 배운다. “그러나 꿈을 이루려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아요. 우선은 어떤 역할이든지 무대에서 빛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발레단에 따르면, 그는 주역이 아닌데도 고정 팬들이 생기고 있다. 그는 그것을 실감하고 있다고 했다. “공연이 끝난 후에 저를 기다리고 있다가 ‘너무 멋있어요’라고 말해주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무대에서의 제 역할을 기억해 준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고마운지….”

그는 요즘 ‘라 바야데르’(11월 1~4일 세종문화회관)와 ‘춘향’(9월 20~21일 콜롬비아 보고타 훌리오 마리오 산토도밍고 마요르극장) 리허설에 열중하고 있다. 인터뷰가 이뤄진 지난달 28일에도 춤을 췄다는 그는 싱그러운 웃음소리를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사실 오늘이 제 생일이거든요. 이따 저녁때는 엄마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데이트를 할 거예요. 무척 설레네요, 호호.”

장재선 기자 jeije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