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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우 前 통일연구원장

오늘로 정전협정 체결 65주년을 맞았다.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정전협정으로 6·25의 포성은 멎었지만, 북한의 군사 도발은 이후에도 줄기차게 이어졌다. 하지만 올해 초 북한의 평화 공세 이후 대화 국면이 전개되면서 ‘평화체제 전환’이 다시 화두로 부상했고, 남북 정상은 ‘4·27 판문점 선언’에서 ‘종전선언·평화협정 연내 추진’에 합의했다. 중국은 자신들이 주장해온 ‘쌍궤병행’에 부합한다며 환영했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남북 간 종전 논의를 축복한다”고 했다. 이런 가운데, 최근 북한의 관영 매체들은 “미국이 입장을 돌변하여 종전선언을 거부하는 것은 유감”이라며 한·미 양국을 향해 종전선언을 채근하고 있다.

평화협정이란 국제법적 구속력을 가지는 합의지만, 전쟁 동기를 가지지 않는 나라들 간에는 필요하지 않다. 바꿔 말해, 흑심(黑心)을 품은 나라가 평화협정에 가로 막혀 전쟁 도발을 포기한 경우는 거의 없으며, 대다수는 평화를 위협하려는 나라들이 상대국의 안보 체제를 허무는 수단으로 평화협정을 악용해 왔다. 1973년 파리평화협정 2년 후 북베트남의 전면 침공을 당한 남베트남은 56일 만에 지도에서 사라졌다. 이는 무수한 시례들 중 하나일 뿐이다. 국내외 전문가들이 북한과의 평화협정은 북핵 폐기는 물론 이후 북한의 변화까지 확인한 후에 검토해야 한다고 보는 것은 이 때문이며, 경솔한 발언과 말 뒤집기를 일삼는 트럼프 대통령도 이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종전선언이란 말 그대로 상징적 ‘선언’일 뿐이다. 법적으로 주한미군 철수나 유엔사 해체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미군은 한·미 동맹조약과 양국의 결정에 따라 주둔하는 것이며, 유엔사는 6·25 발발 직후 안보리가 채택한 결의 제1588호에 따라 결성됐다. 즉, 유엔사를 구성하는 16개 참전국과 후방기지를 제공하는 일본이 합의하지 않는 한 해체될 수 없다. 그런데도 전문가들이 종전선언조차도 매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은 평화협정으로 가는 대문을 활짝 여는 것인 데다, 북한이 ‘사악한 동기’를 품고 있다면 종전선언만으로도 평화협정이 가져올 최악 사태들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평화 공세가 ‘완전한 핵 폐기와 질적인 변화’라는 선의(善意)에서 출발한 게 아니고, 미국과 적당히 타협해 일정 수준의 핵무력을 고수하면서 동맹 이완과 핵우산 제거를 노리는 ‘대남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 상태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된다면 한국이 남베트남이 걸었던 패망의 길을 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평화의 환상이 만연한 가운데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라는 6·25 직전의 구호들이 난무하고 동맹이 와해되는 상황이 전개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종전선언은 이런 사태로 가는 기점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미국은 종전선언에 대해 ‘신중 모드’로 전환해야 하고 한국은 좌고우면해야 한다. 북한은 1974년부터 평화협정을 주장해 왔고, 적화통일 목표를 명시한 ‘유일영도 10대 원칙’과 노동당 규약을 고수하면서 동맹 해체를 지고(至高)의 대남 목표로 삼아왔다. 북한은 6·12 미·북 정상회담 이후 단 한 번도 ‘북핵 폐기’를 명시적으로 약속한 적이 없으면서 이미 많은 것을 얻어냈다. 미 군사행동 가능성이라는 소나기를 피했고, 국제 제재를 이완시켰으며, 한·미 연합훈련 중단이란 가시적 성과도 챙겼다. 그래서 지금 국제사회는 북한을 의심하고 있다. 북한은 종전선언을 요구하기에 앞서 자신들의 선의를 먼저 증명해 보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