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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봉 前 국무총리

혁명을 시도하려면 혁명 주체 세력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고, 분명한 이념과 목표가 설정돼야 하며, 그에 따라 타도의 대상이 되는 적(敵)이 규정돼야 함은 누구에게나 상식에 가까운 얘기다. 그런데 지금의 문재인 정부는 그 세 가지에 대해 모두 연막을 치고 있어 일반 국민으로서는 막연한 상상으로 제 나름의 판단을 하는 상황이라 자못 혼란스럽다.

소통을 그토록 강조하고 대통령의 권력을 제왕적이라 하여 그렇게도 성토했던 지금의 문 대통령은, 국민의 궁금증을 덜어주기 위해 변변한 기자회견 한 번 하지 않는다. 그러니 앞에 든 세 가지에 대한 답은 다른 곳에서 찾는 도리밖에 없다.

그것은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이라는 단체 이름으로 2017년 3월 11일에 발표된 ‘2017 촛불권리선언’과 ‘100대 촛불개혁과제’라는 문건이다. 문 대통령이 즐겨 쓰는 표현으로 바꾸자면 촛불권리선언을 촛불혁명선언, 그리고 촛불개혁과제가 아니라 촛불혁명과제라고 고쳐 써야 맞다. 그 문건 내용의 전모는 혁명이다. 그리고 그동안 진행해 온 정책들이 어쩌면 그렇게도 그 내용과 일치하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문 대통령에게 이 문건은 바이블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여기에 일일이 그 내용을 지적할 수는 없으나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혁명을 통한 대한민국의 체제 변경이다. 그 수단은 전적으로 국가권력의 전횡이다. 그리고 그 기반은 직접민주주의다.

아마 이를 두고 문 정부가 ‘국가주의’를 추구하고 있다는 얘기들이 나온 듯하다. 틀린 판단이 아니다. 그런데 국가주의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경제와 시민사회에 대해서 국가가 차지하는 지배력을 표시하는 것이다. 현실로서의 국가주의는, 국가소멸론을 주장했던 마르크스주의의 전망과는 달리, 오늘날 모든 국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보편적 현실이다. 이를 전제해서 본다면, 문제는 국가주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정도에 따른 구분에 있다.

하지만 특히 우리가 관심을 두는 대상은 신생국가들의 경우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한반도의 남북한이다. 국제정치적으로 주변지대에 속하는 국가들 가운데 국가주의를 개발주의에 흡수시킴으로써 성공한 사례는 터키와 싱가포르를 들 수 있다. 한국과 대만은 아주 예외적으로 안보체제(security regime)와 접목시켜 개발국가로서 성공한 범주에 속한다. 따라서 한국과 대만은 그 체제 조건 때문에 국가권력의 행사에 있어 권위주의적인 국가주의의 모습을 가졌던 건 사실이나, 북한이나 소련, 중국과 같은 전체주의적 국가주의는 추구하지 않았다. 이 사실이 초래한 결과가 현재 우리가 보는 남북한의 차이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모든 성공은 그에 따른 새로운 문제들을 일으키는 것이 어김없는 역사의 진행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이는 정치적으로 개혁의 대상이지, 혁명의 과제는 아니다. 혁명을 기한다면 한국은 전체주의적인 국가주의 체제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제 민주라는 이름으로 그 누구도 권력에 도전할 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은 직접민주주의라는 자동차를, 주사파라는 운전기사가 통일로 위를 북으로 달리고 있다. 아직도 주사파를 주사파라고 부르면 한사코 부정하는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안다. 문 정부가 그동안 추진한 촛불 ‘혁명’이 자칫 진보라는 이름의 반동으로 전락할 징조를 보이는 것은 대단히 우려스러운 일이다.